5·18민주화운동이 40주년을 맞았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온 5·18은 피해자 명예회복, 전두환·노태우 등 가해자에 대한 법적 처벌이 일부분 이뤄졌다. 하지만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아직 미흡하다. 무엇보다 발포명령자를 찾아내지 못했다. 나아가 ‘어둠’의 틈을 타 운동의 참뜻을 훼손하는 세력들이 준동했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5·18을 들여다봤다. <편집자주>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여전히 발포 책임자는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세월이 지나며 여러 정황과 근거들이 나오고 있으나 가장 유력한 책임자인 당시의 권력자와 군 장성들은 여전히 책임을 회피한다. 곳곳에서 양심선언과 사과가 이어졌음에도 5·18 진상규명이 미진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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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광주에서 피를 보게 했나━
5·18 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된 것은 신군부의 집권이다. 1979년 12월12일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씨 이하 신군부는 이듬해 봄 터져나온 시민들의 목소리를 계엄으로 눌렀다. 자연스럽게 5·18 진압에도 신군부 핵심 인물들이 목소리를 내는 구조였다.
당시 군을 이끄는 인물은 주영복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고 계엄사령관은 이희성(당시 육군참모총장 겸직)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표면상 군 통수권을 지닐 뿐 실질적인 역할은 12·12 쿠데타의 주역들이 끼어있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투입된 군부대는 제3공수여단, 제7공수여단, 제11공수여단, 제20사단, 제31사단 등이었다. 이 중 3공수 여단장 최세창과 20사단장 박준병은 12·12 사태에 직접적으로 가담한 인물이었다.
이들이 지휘한 부대도 5·18 민주화운동 진압 과정에서 악명을 떨쳤다. 3공수여단은 다른 공수여단보다 늦게 광주에 투입됐음에도 20일 처음 시민들을 향해 집단발포를 하는 등 총기 사용을 주저하지 않았다.
20사단도 광주가 함락되던 당시 일반병원에 총격을 가하는 등 무자비한 모습을 보였다. 20사단 부대원들의 총격 사실은 당시 응급실 인턴으로 재직 중이던 정성수 전 전남대병원 교수가 지난 2017년 방송에서 직접 증언했다.
나머지 부대라고 시민들에게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가장 먼저 광주(17일 밤 투입)에 들어간 7공수여단(당시 여단장 신우식)의 33대대(지휘 권승만 중령)과 35대대(지휘 김일옥 중령)는 5·18 초기 시민들을 상대로 무차별적 진압을 이어갔다.
이 진압 작전에서 최종적으로 지시를 내린 것은 전두환이었다는 것이 지난 2018년 미 국무부 비밀 외교전문을 통해 확인됐다. 서울에 전두환이 있었다면 현장에는 정호용이 있었다 거다.
시민들을 향해 총구를 들이댔던 이들은 대부분 신군부 집권기 탄탄대로를 이어갔다. 총 책임자인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광주 민주화운동을 진압한 뒤 같은해 8월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접선거로 대한민국 11대 대통령에 오른다. 그의 뒤는 똑같이 12·12 쿠데타의 핵심 인물이었던 노태우에게 돌아간다.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1981년 대장으로 진급했고 2년 뒤 육군참모총장에 올랐고 2년 뒤 예편한다. 이후 전두환-노태우 정부에서 내부무 장관과 국방부 장관을 지냈고 제13대, 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구서갑에서 당선됐다. 정호용을 필두로 소준열 당시 전교사령관, 최세창 3공수여단장, 박준병 20사단장 등은 군대와 정계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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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뻔함 속 두드러지는 노태우의 '사과 행보'━
5·18 민주화운동 책임자들에 대한 심판의 목소리는 80년대 후반부터 나왔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통해 신군부가 물러나고 민주화가 찾아오자 과거사 청산 운동도 본격화됐다. 하지만 책임자들은 이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시민 학살에 대한 책임을 회피한다.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뒤인 1988년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광주특위)가 구성됐고 이에 따라 70명에 달하는 증인들이 특위에 출석해 증언했다. 전두환도 여기에 포함됐다.
책임자였던 전두환은 6월 민주항쟁으로 물러난 뒤 김영삼 정부 들어서 재판에 넘겨졌다. 1995년 앞서 구속된 노태우와 함께 수감됐으나 1997년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에 의해 사면됐다. 주영복, 정호용, 소준열, 최세창, 박준병 등 주요 인물들도 청문회를 시작으로 김영삼 정부 시절 대부분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대부분 사면 조치를 받았다.
이들 대부분은 5·18 민주화운동 강력 진압과 학살에 대한 책임을 부인한다. 당장 전두환만 하더라도 2003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은) 총기를 들고 일어난 하나의 폭동이다"라며 진압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그는 당시 자신이 겸직하던 중앙정보부장 서리직을 내세워 '진압은 계엄군이 담당했는데 중앙정보부장은 계엄군의 지휘를 받는 자리'라고 말하기도 했다. 자신이 발포 명령을 내릴 직접적인 위치에 있지 않았다고 주장한 것이다.
노태우씨는 지난해 8월 장남 노재헌씨를 광주시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로 보냈다. 노씨는 당시 1시간30가량 민주묘지에 머무르며 헌화와 참배를 했다.
또 추모관과 유영보관소, 구묘역 등도 둘러본 뒤 방명록에 "삼가 옷깃을 여미며 5·18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분들 영령의 명복을 빕니다. 진심으로 희생자와 유족분들께 사죄드리며 광주 5·18 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가슴깊이 새기겠습니다"라고 적었다.
노재헌씨는 지난해 12월에도 광주 남구 오월어머니집을 찾아 5·18피해자에게 머리를 숙였다. 노씨는 "5·18 당시 광주시민과 유가족이 겪었을 아픔에 공감한다. 아버지께서 직접 광주의 비극에 대해 유감을 표현해야 하는데 병석에 계셔서 여의치 않다"면서 "광주의 아픔이 치유되길 기원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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