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PU(중앙기억장치) 시장에서 명실상부 1위 제조사였던 인텔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다. /사진=로이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반도체 시장에 대대적인 지각 변동이 일고 있다. PC·모바일 등의 수요가 늘면서 대부분 기업이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가운데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한 업체의 상대적 추락도 눈에 띈다.
무엇보다 업계의 이목을 끈 건 ‘인텔’이다. CPU(중앙기억장치) 시장에서 명실상부 1위 제조사였던 인텔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는 것. 인텔은 지난 7월 CPU 경쟁사인 AMD에 주가를 역전당하는가 하면 시가총액에서도 GPU(그래픽처리장치) 회사 엔비디아에 밀리는 치욕을 맛봤다.
설욕전에 나선 인텔과 이를 누르려는 AMD와 엔비디아. 포스트 코로나를 목표로 각사가 M&A(인수합병)를 통해 성장동력까지 확보하면서 블록버스터급 경쟁이 불가피해졌다.
리사 수 AMD 대표(CEO). /사진=로이터
━
하청업체의 반란… 만년 2위 AMD, 인텔 ‘바짝’ 추격
━
인텔은 반도체업계의 최강자였다. 수십년간 반도체 업계에서 매출·영업이익 1위를 지키며 글로벌 IT 생태계를 이끌어왔다. 특히 인텔은 CPU 시장에서 압도적 점유율을 지속해왔다. 서버용 CPU 시장에서는 무려 95%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하며 그야말로 인텔의 독주체제였다.
하지만 인텔이 2018년부터 부진에 빠지면서 CPU 경쟁사인 AMD가 시장점유율을 뺏어오기 시작했다.
인텔은 CPU 자체 설계와 생산을 고집해왔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공정기술 개발 지연이 거듭 발생했다는 것이다. 반복된 지연은 신뢰도 하락으로 이어지고 결국 반도체 경쟁에서도 뒤처지는 결과를 낳았다는 평가다.
실제 인텔은 올해 2분기 호실적을 발표했음에도 7나노 공정을 적용한 CPU 출시가 6개월 이상 지연된다고 발표하면서 주가가 폭락했다. 당시 주가는 실적 발표 이후 시간 외 거래에서 10.6% 폭락해 54달러까지 떨어졌다.
이에 더해 애플이 ‘탈 인텔’을 선언하면서 악재가 겹쳤다. 인텔 매출에서 애플이 차지하는 비중은 5%에 불과했다. 하지만 애플의 선언은 인텔이 PC시장의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음을 방증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반면 AMD의 경우 CPU를 설계만 하고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에 생산을 맡겨왔다. 그 결과 AMD는 7나노 공정을 적용한 CPU를 인텔보다 먼저 출시했다. AMD는 지난해 4분기 글로벌 CPU 시장에서 15.5%까지 점유율을 끌어올린 데 이어 올해 1분기에도 17%를 기록하는 등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며 인텔을 바짝 추격하고 있다.
또 AMD의 올해 3분기 실적에서 시장 기대치를 웃돌았다. 3분기 매출은 28억달러(약 3조1628억원)로 전년대비 45% 늘었고 전 분기 대비 56% 증가했다. 4분기 매출도 전년대비 41% 증가한 30억달러(약 3조3888억원)에 이를 것으로 예측됐다.
이는 과거 인텔과 AMD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 놀라운 추격이다. 인텔의 하청업체로 출발했던 AMD는 2011년 APU(CPU와 GPU를 합친 통합 프로세서)와 불도저 아키텍처의 실패로 주저앉았다. 2011년 매출 65억7000만달러·순이익 4억9100만달러를 기록했던 AMD는 이듬해인 2012년 매출 54억2000만달러를 기록하고 11억8000만달러의 순손실을 냈다. 2015년에는 국제신용평가기관 무디스로부터 ‘투자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당시 인텔 CEO였던 브라이언 크르자니크는 사원들에게 보낸 문자에서 AMD를 두고 “재기하지 못할 회사니 더 이상 신경쓰지 말고 새 경쟁자 퀼컴에 집중하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AMD가 불과 몇 년 후 인텔에 어퍼컷을 날린 셈이다.
지난 9월 엔비디아가 400억 달러(약 45조원)에 영국 반도체 설계 회사 ARM을 인수하겠다고 발표했다. /사진=로이터
━
역대급 M&A 규모에 반도체 업계 ‘들썩’
━
인텔은 계속된 부진에 SK하이닉스와의 계약을 통한 재도약을 꾀한다. SK하이닉스는 인텔과 내년 말까지 주요 국가의 규제 승인을 얻고 2025년 3월까지 인수 계약을 완료한다고 10월20일 밝혔다. 인수액은 10조3000억원. 인텔은 이 재원을 확보해 주력사업인 CPU에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김선우 메리츠증권 연구원은 “인텔은 주력산업인 CPU 공정개발에서 어려움을 겪자 재원확보 및 주력에 집중하기 위해 이같은 결정을 내린 것으로 추측된다”며 “AMD의 성장에 발목을 잡으면서 주력사업이었던 CPU를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텔 외에도 올해 많은 반도체 업체가 성장을 위한 M&A에 나서면서 다시 한번 시장이 들썩일 것으로 전망된다. 블룸버그통신은 올해 현재까지 합의된 반도체 업계 M&A 규모만 750억달러(약 85조4700억원)에 달한다고 밝혔다. 이는 1073억달러(약120조8734억원) 규모의 2015년에 이어 역대 두번째로 높은 기록이다.
특히 인텔과 SK하이닉스 건을 포함해 큰 규모의 M&A가 무려 3건이다. 지난 9월 엔비디아가 400억 달러(약 45조원)에 영국 반도체 설계 회사 ARM을 인수했다고 밝혔다. AMD는 10월27일 FPGA(프로그래머블 반도체) 기업 ‘자일링스’를 350억달러(약 39조원)에 인수했다고 발표했다.
━
엔비디아·AMD 이종사업 인수… “포스트 코로나 준비한다”
━
이 기업들은 장기적으로 M&A를 통해 포스트 코로나를 준비하겠다는 목표다. 엔비디아와 AMD는 데이터센터 성장을 목표로 이종사업을 인수했다. 코로나19로 여가시간이 늘어나면서 AMD는 게임용 콘솔에 사용하는 반도체로, 엔비디아는 GPU로 수혜를 입었지만 코로나 종식 이후에 대한 준비에 돌입한 것이다.
우선 엔비디아는 ARM 인수를 통해 자율주행과 사물인터넷(IoT) 사업확장에 가속폐달을 밟을 전망이다. 엔비디아는 GPU가 AI와 자율주행을 구현하기 위한 핵심 반도체로 떠오르면서 자율주행차 시장에서 입지를 확대하는 데 성공했다. 실제 엔비디아는 테슬라·토요타·아우디·벤츠·볼보 등을 파트너로 뒀다. 이 때문에 삼성전자·애플을 비롯해 전세계 1000여개 반도체 기업에 설계도를 제공하고 있는 ARM과의 만남은 큰 시너지를 발휘할 것으로 예상된다.
AMD는 FPGA 전문업체 자일링스를 인수해 인공지능(AI)과 5G·서버 시장 등을 노린다. FPGA는 AI·데이터센터·통신산업 등 에 널리 쓰이는 반도체다. FPGA 시장에서 자일링스의 점유율은 50%를 웃돈다. 삼성전자와 화웨이의 5G 칩셋에도 자일링스 제품이 사용되고 있다. 이에 더해 AMD는 인텔의 독무대였던 CPU 서버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대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된다.
김 연구원은 “반도체 업계 내에서 향후 추가적인 성장 동력을 찾기 위한 M&A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며 “엔비디아는 ARM으로 IoT를, AMD는 자일링스를 통해 서버 강화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모두 이종사업과 협력한 케이스다 ”고 분석했다.
인텔은 이미 2017년 자율주행기업 ‘모빌아이’를 인수한 만큼 CPU 강화에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업계 내 추가적인 인수합병이 나올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이같이 반도체업계가 새로운 성장동력 확보에 분주한 상황에서 인텔이 과연 부진을 극복하고 1위를 지켜낼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