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 고전문헌학자© 뉴스1

(서울=뉴스1) 배철현 고전문헌학자 = 개인은 자신이 속한 가족이나 국가와 같은 공동체를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국가가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가? 나는 이름 석 자를 지닌 자립적인 인간인가? 아니면 내가 속한 공동체의 구성원인가? 사회는 개인이 사적으로 하고 싶은 일을 지양하고,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덕이라고 찬양해왔다. 사회는 그런 자들에게 공적을 인정하며 상을 주고 명성을 추서하여 안정된 공동체를 구축해왔다. 우리는 흔히 개인의 자유보다는 공동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숭고한 가치로 여긴다. 개성, 거리낌 없는 대화, 언론 자유, 사적 재산에 대한 권리는 사회공헌이라는 의무를 위해 포기해야 한다.
현대사회의 정치제도는 점점 권위주의적이며 전체주의적으로 변질되어왔다. 현대인들은 자신들이 전체주의국가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물질적인 편함과 그 편함이 가져다주는 중독을 행복으로 착각한다. 정치인들은 시민들이 정부의 강압적인 조절을 허용하도록 어떤 방법으로 설득했는가? 왜 시민들은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으로 고통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사적인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애쓰지 않는가?

우리 대부분은 자유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고 착각한다. 가장 비참한 노예는 자신이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컴퓨터나 휴대폰에 달린 카메라로 매 순간 감시당하고, 무심코 주고받은 문자와 이메일은 검열당할 것이다. 또 누군가는 카드 영수증으로 나의 삶의 패턴을 나보다 더 잘 들여다보고, 나의 취향을 세밀하게 분석한 누군가는 컴퓨터나 휴대폰 광고를 통해 나를 더욱 세뇌시킨다. 자유로운 인간으로 되기 위한 첫 단추는 자신의 자유가 침해당했다는 사실을 수용하는 것이다.


알제리 소설가 알베르 카뮈(1913-1960)는 1960년에 쓴 에세이집 <저항, 반란, 그리고 죽음>이라는 책에서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 정의와 자유의 삶을 촉구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인간으로서의 과업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간의 임무는 '인간으로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을 억압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항하여, 동료 인간을 돕고 인간을 옥죄는 불행에 대항하여 자유를 구가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위대함은 자신이 처한 조건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는 결정에 달려있습니다. 만일 그의 환경이나 조건이 불의하다면, 그(녀)가 이 불의를 극복할 유일한 방법이 있습니다. 자신이 의로운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권력을 주도하는 정치 세력들이 장악하고 장려하는 학교, 대중문화, 특히 주류 미디어에 자주 등장하는 '수다쟁이 현자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세뇌당해왔다. 이런 경향이 오래 쌓여 '집단주의'가 되었다. 집단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간결한 질문은 이것이다. "개인은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국가가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가?" 집단주의를 신봉하는 자들은 개인은 국가를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다.

집단주의 사고방식은 공산주의, 파시즘, 그리고 사회주의를 지탱하는 근간이다.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스 슬로건은 이것이다. '게마인뉴츠 게트 포 아인게누츠'(Gemeinnutz geht vor Eigennutz). '공동선은 개인선에 선행한다'는 이 슬로건은 히틀러, 레닌, 스탈린, 폴 폿, 마오쩌둥의 신조였다. 이는 자신들과 다른 다양한 사상을 품은 사람들을 색출하고 처형하는 단두대가 되었다. 정말 국가의 공동선을 개인선 우위에 두는 것이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는가? 개인의 이기적인 이익을 포기하고 배려와 자비를 베푸는 것이 모두가 함께 잘 살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 초석이 아닌가?


집단주의는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이상적인 조치처럼 보이지만, 그 과정을 가만히 관찰하면 치명적인 철학적 오류를 담고 있다. 철학자 알프레드 화이트헤드(1861-1947)는 이 오류를 <과정과 실재>라는 책에서 설명한다. 그는 학문 세계에서 흔히 일어난 한계와 실수를 '구체적인 사례라고 전도된 오류'(fallacy of misplaced concreteness)라고 불렀다. 학문은 구분의 작업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실제로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구체적으로 존재한다고 종종 착각한다. 그들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인 객체를, 구체적으로 존재한다고 가정하여 이데올로기를 만든다. 사회를 위해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은 희생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집단주의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는 허상을 기반으로 구축된다. '사회'는 개인들이 상호작용하는 공생을 위한 개념으로 용어일 뿐이다. 개념이나 이념이 삶을 이끌지 못한다.

영국의 가명 미술가 뱅크시의 유화 '퇴보된 국회'© 뉴스1

개인은 세상에 실재하지만 집단은 개인들의 상호작용으로 매 순간 새롭게 재편되는 추상이다. 아무리 눈을 씻고 자세히 보아도, 개인과 같이 구체적인 형태를 지닌 객체가 집단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집단은 생각할 수도, 행동할 수도, 말할 수도, 선택할 수도 없는 개념일 뿐이다. 개인 혹은 개인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선을 실현할 수 있는 주체다. 통치자로 위임받은 개인들은 공동선이란 미명하에 강제노동을 강요했다. 그런 통치사회에서 개인은 언제나 피해자였다. 인류는 오랫동안 신, 파라오, 황제, 왕, 국가, 인종, 인민, 혹은 질서라는 고상한 가치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받았다. 누군가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양'이 되는 것이, 문명과 종교에서 자비와 사랑의 상징처럼 되었다.
아버지의 신앙이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아들을 살해하고, 대중의 정신적인 건강을 위해 철학자에게 독배를 마시게 하고, 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낙인 찍어 화형에 처하고, 인종을 정화하기 위해 수백만 명을 가스실에서 죽이고, 인민을 위해 수백만 명을 수용소에 감금했다. 집단주의 이념은 과거에도 지금도, 모든 전체주의, 독재, 그리고 잔학 행위를 용인하는 허울이 좋은 변명이다.

철학자 게오르그 빌헬름 헤겔(1770-1831)은 집단주의의 자식인 공산주의 창시자 카를 마르크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헤겔에게 개인이란 종속적인 존재로 '윤리적인 전체'를 위해 희생해야만 하는 존재다. 국가가 개인의 생명을 원한다면, 개인은 승복해야 한다. 인간은 국가를 통해서 자신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세기 영국 철학자인 오버론 허버트(1838-1906)는 국가가 아니라 개인의 절대적인 중요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개인은 왕입니다. 모든 다른 것들은 이 왕을 위해 존재합니다." '개인이 왕'이란 생각은 계몽주의, 인권, 자유, 그리고 사유재산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총성이 되었다.

개인의 자유는 타인의 곤경이나 고통에 둔감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각자가 개인의 자유가 중요한 만큼, 타인의 자유도 중요하다고 여겨, 자발적인 협력과 노동의 분화를 통해 풍요로운 사회를 추구한다.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여 생긴 부가 그 사회의 소외된 자들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중요한 초석이 될 것이다.

사회적인 협력과 풍요한 사회를 진작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국가 중심의 고압적인 정책이 아니라, 공동체의 타인을 위한 개인의 자발적인 참여다. 나는 개인으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사회의 구성원인가? 나는 개인으로 자유를 행사하는가? 아니면 집단주의 획책의 희생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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