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정유진 기자 = 실존 인물을 연기하는 데는 언제나 부담이 따른다. 특히 현대사 속 인물들을 연기할 경우, 모델이 된 주인공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에 그들조차 고개를 끄덕일만한 '그럴듯함'을 보여줘야만 작품의 재미가 보장된다. 그렇지 않다면 관객들의 몰입을 끌어내기 어렵다.
근래 실제 인물과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들에서 이를 제대로 해낸 배우들이 있다. 2018년 개봉 영화 '공작'에서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 역을 연기한 기주봉과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역을 소화한 이성민이 대표적이다. 두 사람은 실존 인물과 유사한 외모를 만들기 위해 특수분장을 감행했고, 대중의 기억 속에 있는 그 인물들을 연상케 하는 인상적인 연기로 찬사를 받았다. 그리고 앞선 두 배우 못지 않게 실존 인물을 훌륭히 연기해낸 배우가 최근 또 한 명 나왔다. 지난 1월 말 개봉한 영화 '킹메이커'의 설경구다.
'킹메이커'는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과 그의 선거 캠프 참모였던 엄창록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 설경구는 극 중 김대중 전 대통령을 모델로 한 정치인 김운범을 연기했다. '공작'의 김정일 위원장과 '남산의 부장들'의 박정희 대통령은 영화의 중심에서 비껴난 인물들이었다. 이들의 역할은 극적인 긴장감을 상승시켜 주인공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으며 그 때문에 각 캐릭터는 실제에 가깝게 '모사'되는 것이 중요했다.
반면 '킹메이커'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모티브로 한 김운범 역은 두 명의 주인공 중 하나다. 극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인물이 아닌 실질적으로 극을 이끌어 가는 중심 인물인 것. 이름을 그대로 쓸 경우 발생할 여러 부담감을 피하기 위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캐릭터에는 '김운범'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었지만, 영화를 보는 이들은 김운범이 김대중 전 대통령이라는 것을 안다. 애초 설경구는 배역을 두고 큰 고민에 빠졌었다고 한다. 처음 '킹메이커'에서 그가 맡은 캐릭터의 이름은 '김대중'이라고 표기가 돼 있었고, 실존 인물에 대한 부담감을 크게 느낀 설경구는 감독에게 배역의 이름을 바꾸자고 제안하기도 했었다고.
결국 김운범이 됐지만, 설경구는 실존 인물인 김대중 전 대통령을 훌륭하게 연기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모사하려는 노력을 하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전직 대통령이 갖고 있었던 올곧으면서도 인간적인 분위기를 잘 살려냈다. 여러 번 등장하는 연설 신에서는 젊은 정치인의 소신과 신념이 잘 드러나고, 서창대(이선균 분) 및 선거 캠프의 캐릭터들과 붙는 신에서는 온화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매력이 엿보인다. 이 같은 연기는 대중이 기억하는 실존 인물의 캐릭터와 호응하며 갈수록 몰입을 끌어낸다.
어떤 면에서 '킹메이커'의 설경구는 영화 '변호인'(2013)의 송강호와 비슷하다. '변호인'에서 송강호는 극의 주인공이자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서 따온 인물인 송우석을 연기했다. 송강호 역시 노무현 전 대통령을 그대로 모사하지 않았지만, 설득력 있는 연기로 찬사를 이끌어 낸 바 있다. 설경구 역시 송강호 못지 않게 연기로 관객들을 설득한다. 나아가 실존 캐릭터보다는 송우석이라는 인물에 집중해 에너지를 분출했던 송강호와 달리 설경구는 실존 인물의 미묘한 분위기를 살려내며 다른 종류의 보는 재미를 주기도 한다.
정작 설경구는 '킹메이커'의 개봉을 앞두고 진행한 인터뷰에서 "연기를 해내기에 재밌는 캐릭터는 아니었다"며 "처음에는 정말 이 역할을 안 하고 싶었다, 배우로서 크게 할 역할이 없다고 생각했다"고 토로한 바 있다. 하지만 '킹메이커' 속 그의 연기를 보는 관객들의 의견은 그와는 다를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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