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의 한 재개발 사업에서 최초 계약 대비 49.9% 인상된 공사비를 조합 측에 청구했다. 조합은 시공사 요구대로 공사비가 뛸 경우 조합원 1인당 추가 분담금이 2억원 가까이 늘게 된다며 인상 요구를 거부했다. /그래픽=강지호 디자인 기자
"일반분양에 성공할 가능성이 낮으면 이미 투자한 사업비가 수백억원에 달하더라도 포기하고 발을 빼는 상황인데 무리해서 수주하거나 사업을 지속할 이유는 없죠."
국내 시공능력 10위권인 한 대형건설업체 고위 관계자는 재개발·재건축 등 징비사업 시공과 관련, "지금 상황에서 조합이 고집하는 공사비로는 적자가 불가피하다"며 "적자만 나지 않는 수준으로 유지한 것조차 힘들어진 상황"이라고 푸념했다.

이 업체는 최근 수도권의 한 재개발 사업에서 최초 계약 대비 49.9% 인상된 공사비를 조합 측에 청구했다. 조합은 시공사 요구대로 공사비가 뛸 경우 조합원 1인당 추가 분담금이 2억원 가까이 늘게 된다며 인상 요구를 거부했다. 물가 상승률의 수십 배를 넘는 공사비 폭등에 정부가 나서 중재하는 사태도 발생하고 있다. 재개발·재건축 조합들이 기댈 곳은 공적 기관의 공사비 검증뿐인데 최근엔 이마저도 어려워져 조합원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공사비 검증 실효성 떨어져
1조7000억원대 공사비 증액 문제로 지난해 반년 동안 공사가 중단됐던 서울시내 최대 재건축 사업장인 '둔촌주공'(단지명 '올림픽파크 포레온')은 한국부동산원에 공사비 검증을 의뢰한 결과 요청 내역의 14%만 수행할 수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

부동산원 측은 검증이 불가한 항목에 대해 업무영역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었다. 조합은 다시 민간기관에 공사비 검증 추가 의뢰를 한 상태다.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에 따라 재개발·재건축 과정에서 토지 등 소유자 또는 조합원 5분의 1 이상이 동의하면 공사비 증액 비율이 일정 기준 이상인 경우 공사비 검증을 요청할 수 있다.

서울시는 정비사업 조합과 시공사 간의 갈등 해소를 위해 공사비 검증 제도를 강화, 산하 공공기관인 서울주택도시공사(SH)의 검증기관 지정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공공기관의 공사비 검증 결과는 강제성 없는 권고 사항일 뿐이란 점도 조합엔 부담이다. 조정 기능이 없어 조합과 시공사 간의 갈등을 부추길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둔촌주공 조합원들은 추가 분담금과 이주비 대출 이자 부담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자 채권은행을 찾아가 금리 인하를 요구하며 집단 항의도 했다. 이주비 대출 이자는 현재 7% 수준에 달한다.

그래픽=강지호 디자인 기자
공사비 37% 올려도 입찰 외면
최근엔 경쟁입찰이 아닌 단독 수의계약으로 시공권을 따내는 경우도 늘었다. 포스코이앤씨(옛 포스코건설)의 '방배 신동아' 재건축, DL이앤씨·코오롱글로벌의 '평촌 센텀퍼스트' 등도 수의계약을 했다. 현행법상 정비사업 시공사를 선정할 때는 2개 이상 입찰 참여자가 있어야 유효경쟁이 성립된다. 2회 이상 유찰 시엔 단독 입찰한 건설업체와 수의계약을 허용한다.
불과 수년 전 서울 강남 재건축이나 지난해 용산 한남2구역 재개발 사업 등에서 금품 제공, 불법 투표의 의혹이 제기되는 등 경쟁이 과열되던 것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건설업계 한 관계자는 "재개발·재건축 도급계약서에 '착공 후 원자잿값 인상을 청구하지 않는다'는 조건 자체가 리스크(위험)"라며 "그동안 공사비 인상에 소극적이던 조합들이 추가 공사비를 내더라도 사업을 하겠다는 곳이 있지만 서울 핵심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 사업장은 현재로선 발을 빼는 것이 낫다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시공사들이 경쟁입찰을 꺼릴 경우 결국 분양가와 공사비 협상에서 조합 측이 끌려갈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된다.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2가 '남성맨션' 재건축 조합은 1년 3개월 새 공사비를 37%가량 인상된 3.3㎡당 719만원으로 올리고 입찰보증금을 종전 90억원에서 50억원으로 낮췄지만 입찰 참여자가 없어 지난 4월7일 다섯 번째 시공사 선정에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