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나서는 자들의 계절이었다. 광장에, 거리에 목소리가 모였다. 그런데 요즘의 봄은 그 양상이 조금 다르다. 같은 장면이 동시에 '화면'에서도 펼쳐진다. 겨우내 안으로 파고들었던 확신은 알고리즘 위로 떠오르고, 소수가 공유하던 독설은 네트워크를 통해 증폭된다. 빠르게 복제되고, 오래 노출된다.
다만 침묵은 검색되지 않는다.

새로운 무대가 열리면 어김없이 웅변이 그 자리를 채운다. 확신에 찬 목소리, 상대를 베어 넘기는 날 선 문장들. 사람들은 화려한 말의 잔치에 환호한다. 그러나 조명이 꺼지고 난 뒤, 남는 것은 의외로 많지 않다. 말이 거칠고 화려할수록 우리는 종종 그 안의 빈자리를 늦게 알아차린다. 소란스러운 언어는 때로 자신의 불안을 덮기 위한 소음처럼 들리기도 한다.


무대 아래에는 시선을 낮추고 말을 아끼는 이들이 있다. 세상은 그들을 내성적이거나 소극적이라 부르지만, 어쩌면 말의 무게를 더 오래 견디는 쪽은 그들일지도 모른다.

■ 웅변가의 독설, 그 가벼운 유혹
살면서 마주한 웅변가들은 대개 매혹적이었다. 명쾌했고 뜨거웠다. 그러나 무대가 끝나고 조명이 꺼진 뒤, 그들과 마주 앉아 보면 묘한 공허가 느껴지곤 했다. 방금 전까지 세상을 구원할 듯 외치던 문장들은 사라지고, 타인의 인정에 목마른 초조함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독설은 때로 가장 쉬운 방식의 배설이 된다. 상대를 무너뜨림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가장 손쉬운 방식의 권력 행사다.


에밀 쇼랑(Emil Cioran)은 '태어났다는 불행'에서 확신과 웅변의 허위를 여러 차례 지적한다. 그는 인간이 확신에 매달릴수록 스스로를 더 깊이 속이게 된다고 말한다.

웅변은 진리를 드러내기보다, 때로 자기기만을 세련되게 포장하는 기술에 가깝다. 나서는 자들의 언어는 타인을 향한 칼날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자기 안의 불안을 향해 휘두르는 비명일지도 모른다.
미디어는 질문보다 확신을 좋아한다. 망설임은 편집되고, 단정은 제목이 된다. 그 구조 속에서 웅변은 더욱 힘을 얻는다.

■ 수줍은 외면, 그 깊은 응시
소란 속에서 고개를 숙인 이들이 있다. 그들은 말할 줄 몰라서 침묵하는 것이 아니다.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복잡함을 알기에 신중할 뿐이다.
그들의 수줍음은 나약함이라기보다, 상황의 무게를 감각하는 예민함에 가깝다.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은 '팡세'에 이렇게 적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사실, 즉 방 안에 조용히 머물러 있을 줄 모른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나서는 자들이 소음으로 자신을 채울 때, 침묵하는 자들은 고독 속에서 생각을 가다듬는다. 그들의 외면은 비겁함이 아니라, 거짓된 무대에 쉽게 동조하지 않겠다는 거리두기일 수도 있다.

물론 침묵이 언제나 고결한 것은 아니다. 침묵 역시 계산이 되는 순간 다른 얼굴을 갖는다. 말하지 않음이 신중함이 아니라 편의가 될 때도 있고, 책임을 미루는 방식이 될 때도 있다.

■ 말의 배반과 침묵의 복권
우리는 오랫동안 웅변을 지성으로, 침묵을 무지로 오해해왔다. 그러나 인문학은 종종 그 반대를 말한다.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키치'를 불편한 질문을 제거하고 세계를 단순한 감동과 확신으로 포장해 버리는 태도라 정의한다.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대답의 세계. 그곳에서 확신은 미덕이 되고, 망설임은 나약함이 된다. 웅변이 지배하는 곳에서 진실은 종종 소음 뒤로 물러난다. 매끈하게 가공된 문장만이 떠다닌다.

독설이 현란한 이유는 알맹이가 비어 있어서다. 반대로 침묵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 안에 너무 많은 생각이 머물러 있기 때문일 것이다.

■ 고요한 응시에서 찾은 힘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는 계절,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수줍음이 아니라 말의 과잉이다. 웅변하는 혀는 쉽게 단정하지만, 망설이는 눈동자는 쉽게 거짓을 말하지 못한다.

지금 우리는 어떤 말에 더 많이 노출되어 있는가. 큰 목소리인가, 아니면 조용히 생각하는 사람의 눈빛인가.
우리가 오늘 내뱉은 확신 속에 정말 생각이 충분히 머물러 있었는지 묻게 된다.
어쩌면 곁에서 조용히 시선을 피하던 누군가는 더 오래 고민하고 있었을 거다.

큰 목소리는 늘 먼저 도착한다. 그러나 오래 남는 것은 대개 늦게 도착한 생각이었다.

그래서 책을 읽는다.
이미 오래전 침묵 속에서 사유를 다듬은 이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소음이 아니라 생각을 따라가기 위해.
만사유책(萬事有冊).
읽는 인간이 되고자 하는 또 하나의 이유다.
김영태 아케이드 프로젝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