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클립아트 코리아
올해 정기주주총회 시즌은 달랐다. 2025년 말 단행된 대규모 상법 개정이 처음으로 기업 정관 속에 녹아드는 해였기 때문이다. 수십 년간 소수주주의 이사회 진입을 막아온 집중투표제 배제 조항이 삭제되고 대주주 입김에서 벗어난 독립적 감사위원 수가 늘어나며 이사에게 붙어 있던 '사외이사'라는 명칭이 '독립이사'로 바뀐다. 소수주주 보호와 감사 독립성 강화를 향한 제도적 틀이 비로소 완성됐다.
26일 정기주주총회가 열리는 증권사 가운데 금융지주 계열을 제외한 DB증권·NH투자증권·교보증권·유안타증권·유진투자증권·키움증권·현대차증권 등 7개사의 주총 소집공고를 전수 분석한 결과 이들은 일제히 상법 개정을 반영해 정관을 대폭 손질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개정의 출발점은 이른바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다. 국내 증시는 오랫동안 불투명한 기업 지배구조와 소수주주 권익 보호 미흡으로 글로벌 동종 기업 대비 저평가를 받아왔다. 정부와 국회는 2025년 상법 개정을 통해 이사회 독립성, 소 권리 행사, 감사 기능 실질화라는 세 축을 동시에 손봤다. 7개 증권사는 올해 주총을 계기로 이 변화를 정관에 일제히 담아냈다.
'사외이사'는 사라지고 '독립이사'가 온다… 명칭 변경이 담은 의미
7개사 모두 정관 전반에 걸쳐 '사외이사'를 '독립이사'로 교체했다. 상법 개정으로 상장사 사외이사의 법적 명칭이 변경된 데 따른 것으로, 이사회 구성·임원후보추천·감사위원회·책임감경 조항 등 수십 개 조항이 일괄 정비된다.


단순한 이름 교체로 보일 수 있지만 입법 취지는 다르다. '사외이사'가 회사 외부 출신이라는 형식 요건에 방점을 찍었다면, '독립이사'는 대주주로부터의 독립성 자체를 법적 자격 요건의 본질로 규정한다. 이번 개정의 출발점인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의 의지를 담은 명칭 변경이다.
그래픽=신재민 편집위원
집중투표제 의무로 소수주주 권리 강화
7개사 모두 정관에서 '2인 이상 이사 선임 시에도 집중투표제를 적용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삭제했다. 상법 개정으로 자산 2조원 이상 상장사는 더 이상 이 제도를 막을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집중투표제는 이사 선임 시 주식 수에 선임 이사 수를 곱한 의결권을 특정 후보에게 집중 행사하는 제도다. 소수주주가 이사회에 자신들의 대표를 진입시킬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통로였지만, 기업들은 정관 배제 조항으로 수십 년간 이를 봉쇄해왔다. 이번 개정으로 그 장벽이 허물린다.
대주주도 못 막는 감사위원 2명… 경영진 견제 고삐 죈다
이번 개정 가운데 실질 효과가 가장 두드러지는 항목이다. 7개사 모두 이번 상법 개정에 따라 대주주와 분리해 선임해야 하는 감사위원 수를 1명에서 2명으로 늘렸다. 분리선임 대상 감사위원을 뽑을 때는 최대주주와 그 특수관계인의 의결권이 발행주식 총수의 3%로 제한된다.

따라서 아무리 지분이 높아도 초과분은 행사할 수 없다. 대주주 영향에서 차단된 감사위원 수가 늘어나는 만큼 경영진 견제 기능이 구조적으로 강화되는 셈이다.
집중투표제·감사위원 확대, 금일 선임되는 이사엔 해당 없어
제도가 현실로 안착하기까지는 넘어야 할 벽이 있다. 주총에서 정관이 바뀌더라도 핵심 변화들은 바로 작동하지 않는다. 집중투표제와 감사위원 분리선임 확대는 오는 9월10일 이후부터, 독립이사 명칭 전환은 7월23일, 전자주주총회는 2027년 1월1일부터 적용된다. 따라서 금일 주총에서 정작 일반주주가 체감하는 변화는 없다.

집중투표제의 현실적 한계도 있다. 실제 행사하려면 일반 회사는 발행주식의 3% 이상, 자산 2조원 이상 대규모 상장회사는 1% 이상을 보유한 주주가 주주총회일 6주 전까지 서면 혹은 전자문서로 청구해야 한다. 과거보다 요건은 완화됐지만 여전히 소수주주가 뭉쳐 이 요건을 통과하기란 어려움이 있다. 국내 기관투자자들의 주주행동이 그간 소극적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분간 실질적 효과는 제한적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게다가 독립이사로 이름은 바뀌었지만 금피아 선호 관행은 여전하다. 이번 주총에서 독립이사 후보로 오른 인물 가운데는 현직 금융위원회 산하 자문기구 위원장(NH투자증권 신진영), 전 금감원 금융투자감독 부원장보·거래소 유가증권시장본부 부이사장(DB증권 이은태) 등이 포함돼 있다.

키움증권 등 일부 증권사에서 독립이사의 연속 재임 상한이 오히려 5년 초과에서 6년 초과로 늘어난 점도 눈에 띈다. 상법이 기준을 6년으로 통일하면서 독자적으로 더 엄격하게 운용하던 회사들이 법적 기준에 맞춰 느슨해진 셈이다. 같은 이사회에 오래 앉아 있을수록 경영진과의 유착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은 지배구조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문제다.

전자주주총회도 정관에 근거 조항을 신설했지만, 이미 전자투표제를 수년째 운용해온 점을 감안하면 2027년까지의 유예 기간은 길다. 보안 취약성 검증과 디지털 취약 계층의 접근성 격차는 시행 전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한편, 유진투자증권은 이번 정기주총에서 상법 개정 반영과 별개로 기관전용 사모집합투자기구(기관PEF)의 업무집행사원(GP) 업무 및 설립·운용·관리 업무를 사업목적에 신규 추가했다. 중소형 증권사가 PEF 운용사 역할을 정관에 명문화한 것은 IB 사업 확대 의지의 공식화로 읽힌다. 연기금과 공제회 등 기관 자금이 대거 몰리며 빠르게 성장하는 기관PEF 시장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겠다는 선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