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리가 문을 열었고, '세리 키즈'가 그 길을 따라 세계 무대로 쏟아져 나왔다. 박인비는 메이저 무대를 지배했고, 고진영과 김효주는 세계 정상에서 한국 여자골프의 깊이와 완성도를 보여줬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리더보드에는 늘 여러 명의 한국 선수가 자리했고, 메이저 대회 우승 소식도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영광도 서서히 저물기 시작했다.
해외 무대에 도전하는 선수의 숫자는 줄었고, LPGA 투어에서 꾸준히 우승을 다투는 선수층도 얇아졌다. KLPGA 투어의 규모와 상금, 인기와 상업적 가치가 크게 성장한 것은 분명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국내에 머물러도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굳이 낯선 언어와 긴 이동, 치열한 생존 경쟁을 감수하지 않아도 된다. 국내에서 스타가 되고, 광고와 후원, 방송의 주목을 받는 길이 훨씬 안정적으로 보일 수 있다. 세계 최고가 되겠다는 꿈보다 지금 누릴 수 있는 성공에 안주하기 쉬운 구조다.
그래서 유해란의 메이저 2연승은 더 특별하다.
유해란은 13일 아문디 에비앙 챔피언십에서 연장 승부 끝에 정상에 올랐다. 불과 2주 전 KPMG 여자 PGA 챔피언십을 제패한 데 이은 메이저 2연승이다. 한국 선수가 메이저 대회를 연속으로 우승한 것은 2013년 박인비의 3연승 이후 13년 만이다.
기록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지만, 지금의 세계 여자골프 환경을 생각하면 의미는 더욱 커진다.
현재 LPGA 투어에는 넬리 코르다와 지노 티띠꾼이라는 걸출한 원투펀치가 버티고 있다. 코르다는 압도적인 장타와 완성도 높은 경기 운영을 갖춘 세계 최강자다. 티띠꾼은 정교함과 안정성을 바탕으로 매 대회 우승을 노린다. 미국과 태국을 중심으로 선수층은 더욱 두꺼워졌고, 유럽과 일본 선수들의 경쟁력도 크게 높아졌다.
과거처럼 한국 선수라는 이유만으로 우승 후보로 분류되던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더 멀리 치고, 더 정교하게 공략하며, 더 강한 체력과 정신력을 갖춰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런 무대에서 유해란은 메이저 두 대회를 연속으로 가져갔다.
에비앙 챔피언십 3라운드에서 기록한 60타는 남녀 메이저 대회를 통틀어 18홀 최소타 신기록이었다. 이글 1개와 버디 9개. 하지만 유해란의 진짜 강점은 몰아치는 능력에만 있지 않았다.
최종 라운드에서 퍼트가 좀처럼 들어가지 않았고, 브룩 헨더슨은 이글과 홀인원을 앞세워 7타 차를 지워냈다. 일본의 이와이 아키까지 추격에 가세했다. 16번 홀에서는 세 선수가 공동 선두가 됐다.
유해란은 흔들렸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17개 홀 동안 버디가 하나도 없었던 그는 마지막 18번 홀에서 약 4m 거리의 버디 퍼트를 성공시켰다. 가장 들어가지 않던 퍼트가 가장 절실한 순간에 들어갔다. 헨더슨이 이글을 잡아 승부를 연장으로 끌고 갔지만, 유해란은 다시 치른 18번 홀에서 흔들림 없이 버디를 잡아냈다.
"매 홀 기도하는 마음으로 쳤다."
우승 뒤 유해란이 남긴 말이다. 그 짧은 표현에 그의 골프가 담겨 있다.
유해란은 화려한 말보다 묵묵한 걸음으로 여기까지 왔다. 지난 5월 가벼운 수술을 받고 6주 동안 투어를 떠나 있어야 했지만, 복귀 직후 메이저 두 대회를 연속으로 제패했다.
쉬운 길보다 정석을 택했고, 국내의 안정된 성공보다 세계 최고가 되겠다는 꿈을 놓지 않았다.
한국 여자 선수들이 모두 해외로 나가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KLPGA 투어에서 뛰는 것 역시 훌륭한 선택이다. 다만 한국 여자골프가 다시 세계 정상에 서려면 누군가는 더 큰 무대로 나가야 한다. 익숙함을 버리고 실패를 감수하며, 세계 최고의 선수들과 매주 경쟁해야 한다.
유해란은 그 길이 여전히 가장 큰 기회의 길이라는 사실을 보여줬다.
그는 KPMG 여자 PGA 챔피언십과 에비앙 챔피언십 우승으로 불과 2주 만에 약 50억 원의 상금을 벌었다. 세계 여자골프는 지금 사상 최고의 부흥기를 지나고 있다. 대회 규모는 커지고, 상금은 빠르게 늘어나며, 최고 선수들이 누리는 보상과 영향력도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큰 무대는 더 치열하다. 대신 더 큰 보상과 더 넓은 가능성을 준다. 세계 최고들과 경쟁해 얻은 우승은 상금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명예와 영향력, 선수로서의 새로운 지위가 함께 따라온다. 유해란은 국내의 안정된 성공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 무대를 향해 묵묵히 걸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얼마나 큰 결실로 돌아올 수 있는지를 증명했다.
지금 유해란은 한국 여자골프에 새로운 답을 보여주고 있다. 더 큰 꿈을 꾸는 선수에게 가장 큰 무대는 여전히 가장 큰 기회의 땅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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