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독일 제국의 두 번째 황제인 빌헬름 2세는 신흥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독일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과신한 나머지, 사라예보에서 발생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을 맞아 휴양지에서 세르비아에 전격적으로 선전포고를 단행했다. 만일 아버지인 빌헬름 1세가 취해 왔던 신중함과 균형 외교에 대한 핵심 참모들의 냉철한 조언에 귀를 기울였더라면, 제1차 세계대전은 물론 독일 제국의 소멸도 존재하지 않았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 총리와 몰트케 장군 등 노회한 참모들의 현실주의적 진단과 조언을 흔쾌히 받아들인 '열린 귀'를 가진 지도자였다.
반면 아버지의 참모 중용을 비판했던 아들은 우월감과 자기 확신에 가득 차 있어 "영국·프랑스·러시아 3대 연합국과 동시 교전하면 필패에 도달한다"는 식자들의 조언을 뿌리치고 손쉽게 선전포고를 내려 제1차 세계대전의 서막을 장식했다. 세계사적 비극의 출발점은 바로 최고 지도자의 축적된 자부심과 일방적 우월감이었다. 평소 선대 황제를 보필했던 경세가들을 가까이 두고 비전을 공유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면전에서 대(對)세르비아 선전포고를 반대하는 고언에 귀를 기울였다면 20세기 세계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지도자는 평상시에 자리와 직책에 연연하지 않고 객관적 상황과 공동 가치를 향한 충언(忠言)을 마다하지 않는 사부(師父)를 곁에 두어야 할 책무가 있다. 그 사부들이 언제나 옳은 방향으로 제언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들의 존재 자체가 공동 이익 실현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소위 최고 권력자에 대한 견제와 균형의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을 때 주요 결정의 공론화가 객관성과 보편성에 접근할 수 있는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지도자의 심기에 맞는 조언을 주도하는 분이나, 지도자와 동일한 사회화 과정 또는 배경을 가진 분들은 지도자의 파트너가 될 사부로서 적합하지 않다. 어디까지나 전체 공동체의 관점에서 보편적 가치의 연속선상에서 조언할 자세와 역량을 갖추고 지도자의 공백을 메워야 한다. 지도자 역시 사부 역할을 담당하는 동지들의 언급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의견은 최소한으로 정리하는 남다른 포용력을 갖추어야 한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이 주관한 6~7명 내외의 공기업·정부 혁신회의에 참여한 바 있는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노 대통령은 자신이 주도하는 공공부문 혁신 방향에 문제점을 제기하는 참석자들(당시 감사원장 포함)의 의견에 한 번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본인이 임명한 고위 공직자조차 혁신 과정이 외화내빈의 양상을 띠고 있다는 지적에도 묵묵히 경청하면서, 이런 점을 혁신 주무부서(행정안전부)가 고려해야 할 것임을 강조하며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공감대 넘치는 결론을 도출해 냈다.
사법개혁, 국가 핵심 산업의 입지 결정과 같은 국가 중대 사안을 정치적 목표, 성장 과정, 지역 선호 등 동색(同色)으로 채색된 책임 공직자들이 결론을 내리는 것은 비록 신속하고 단호하다는 이점이 있더라도, 주요 결정에 포함되어야 할 다양한 정책 고려 요소들이 배제될 여지가 높다는 점 역시 깊이 헤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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