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원자력 협정을 맺고 그동안 금지해온 외국에서의 우라늄 농축 및 사용후핵연료 재처리를 사실상 허용하기로 했다. 사진은 2025년 11월 백악관에서 만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의 모습. /로이터=뉴스1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사우디아라비아와 원자력 협정을 체결했다. 미 에너지부는 22일 "양국이 '평화적 핵 협력 협정'과 '양자 핵 안전조치 협정'에 서명했다"며 "높은 수준의 핵 안전, 안보, 핵 비확산 기준을 유지하게 된다"고 밝혔다. 문제는 미국 원자력법 123조에 따른 외국의 '독자 우라늄 농축 및 사용후핵연료 재처리'를 금지하는 '황금 기준'이 이번 협정에선 빠졌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지금까지 한국·아랍에미리트(UAE)와 국제원자력기구(IAEA)·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 등 51개 국가·국제기구와 원자력협정을 맺으면서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이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해왔다.

외신 보도를 종합하면 이번 협정으로 미국은 사우디에 원전을 건설하고 원전 연료용 우라늄 농축 및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기술을 이전한다. 기존 국제 원자력 원칙·규범을 포기한 이번 협정은 사우디 원전 건설 사업에 러시아와 중국의 진출을 봉쇄하면서 미국 참여를 보장받는 일종의 '딜'로 보인다. 사우디에 사실상 '우라늄 농축'의 길을 터준 셈이다. 다만 농축과 재처리엔 미국 인력만 접근하도록 제한하는 '블랙박스' 방식으로 사우디 핵 개발 시도를 견제할 제동장치는 남겨뒀다.


사우디의 선례가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을 통한 한국의 우라늄 농축 및 재처리 권한 확보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주목된다. 한·미 협의를 통해 이 권한을 포괄적으로 확보해야 우리 원전산업이 핵연료 주기를 완성하고 핵연료 공급망을 확보하는 것은 물론, 현재 사용후핵연료 임시 저장시설 포화상태로 가동 중단 위기를 맞고 있는 국내 원전에 숨통을 틔워줄 수 있다.

지난해 10월 경주 한·미 정상회담 공동 팩트시트에는 '미국은 한국의 우라늄 농축 및 사용후핵연료 처리 절차를 지지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도 지난해 12월 워싱턴 등에서 미국 측과 원자력 잠수함 협력, 농축 및 재처리 등 후속 협의를 진행했다. 지난 1월엔 '한·미 원자력 협력 범정부 협의체(TF)'도 출범했다. 이후 지난달 1차 실무 협상이 이뤄졌지만 한·미 원자력 협정 개정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우라늄 농축 및 재처리 권한 확보를 위해선 긴밀한 한·미 신뢰와 협력이 중요하다. 하지만 최근 강경화 주미대사가 이례적으로 귀국해 국가안보회의(NSC) 상임위에 참석하는 등 한·미 관계에 이상징후가 엿보이는 것은 우려스런 흐름이다. 관세, 남북관계, 동북아 정세, 쿠팡 문제 등 양국 간 현안을 적극적으로 관리하면서 원자력 질서 변화에 따른 양국 협력을 새롭게 도모할 필요가 있다. 중동 원전 진출 경험이 있는 한국과 기술은 보유하고 있지만 오랫동안 원전 건설을 중단했던 미국은 사우디 공동진출로 시너지를 극대화할 수 있는 최상의 파트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