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는 공영방송 이사 임명과 관련해 결격사유가 명확히 확인되지 않은 후보자는 자동 임명하고 추후 사유가 확인되면 당연퇴직 처리하기로 결정했다./사진=뉴스1
공영방송 이사진 교체와 새 경영진 선임 절차가 본격화하고 있다. 그러나 출발부터 잡음이 적지 않다. 개정된 법에 따라 KBS·MBC·EBS 이사회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결격사유 논란이 잇따랐다. 대선 캠프 전력 등이 문제가 되면서 후보자 3명의 추천이 철회되거나 자진 사퇴했다. 선대위 부위원장 활동 논란이 제기된 전직 외교관은 자격 시비가 계속되는 가운데 법정 시한 경과로 자동 임명됐다. 언론노조 MBC본부와 민언련 등 시민단체가 "과거 정권의 방송 장악을 비판했던 명분이 무색해졌다"고 비판할 정도로 후폭풍도 이어지고 있다.
낯선 풍경은 아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공영방송 이사진과 사장 선임을 둘러싼 갈등은 되풀이됐다. 여당은 '방송 정상화'를, 야당은 '언론 장악'을 외쳤지만 정권이 바뀌면 입장도 손쉽게 뒤바뀌곤 했다. 이 같은 정치적 악순환을 끊겠다며 지난해 방송3법이 개정됐다. 사장후보국민추천위원회를 도입하고 이사 추천 방식을 다양화하는 등 제도 개선이 이뤄졌다. 그러나 절차를 고쳤다고 정치의 영향력까지 사라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새 법 체계는 다른 허점을 드러낸다. 그동안 정치권은 관행적으로 공영방송 이사 선임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이제 그 영향력은 법적 틀 안으로 들어왔다. 방송3법은 공영방송 이사의 약 40%를 정치권 추천 몫으로 규정하고 있다. 선임된 이사들이 자신을 추천한 정치세력의 이해관계에서 완전히 자유롭기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방송 심의·규제기구가 구성 방식 때문에 끊임없이 정파성 논란을 겪어온 현실을 떠올리면 과장된 우려가 아니다.


공영방송은 특정 정권이나 진영을 위해 존재하는 조직이 아니다. 시장 논리만으로는 채워지기 어려운 공적 정보를 제공하고 지역과 문화, 교육 콘텐츠를 책임지며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것이 존재 이유다. 국민이 수신료와 공적 재원을 부담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문제는 현실이 그 기대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데 있다.

KBS의 경우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장 교체를 둘러싼 극심한 갈등을 반복해 왔다. 강압적으로 교체된 사장에 대해 법원이 뒤늦게 부당성을 인정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 이번에는 다를 거라는 기대도 있지만, 이사의 숫자를 늘리는 것만으로 체질까지 달라지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 제도적 혼란도 추가됐다. 개정 방송법은 이사 추천 방식 등을 편성위원회에서 방송편성규약으로 정하도록 했다. 그런데 노조 간 갈등이 이어지며 내부 임직원과 시청자위원 몫 이사 추천 절차가 지연되고 있다. 공영방송 지배구조를 민주화하겠다며 만든 절차가 현장에서는 대표성 다툼과 절차 공백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MBC의 문제는 더 복합적이다. MBC는 소유구조상 공영성을 갖고 있지만, 재원구조나 영업 방식은 민영방송과 크게 다르지 않다. MBC가 공영방송을 자임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공정성과 사회적 신뢰를 먼저 입증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의 신호는 가볍지 않다. MBC는 지난해 시사인이 한국갤럽에 의뢰한 조사에서 '가장 신뢰하는 언론'과 '가장 불신하는 언론'에 동시에 이름을 올렸다. MBC 경영평가단은 "영향력이 크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기반이 특정 수용자층에 편중돼 있음을 시사한다"고 분석했다. 신뢰도와 불신도가 동시에 높다는 사실은 공영방송이라면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경고다.


최근 내부의 자성도 있었다. 언론노조 MBC본부 산하 민주방송실천위원회는 6·3 지방선거 보도를 점검하면서 일부 뉴스 오프닝이 특정 정당의 선거 광고처럼 비칠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여야 관련 보도에서 균형감이 부족했다는 비판도 나왔다. 최승호 전 MBC 사장도 SNS에서 "진실 추구와 선거 보도 편파성은 다른 문제"라고 지적했다. 공영방송의 신뢰는 외부의 공격만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내부의 관행과 편향에 둔감해질 때 더 깊이 흔들린다.

공영방송이 변해야 하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미디어 환경의 변화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국민은 저녁 뉴스 시간에 맞춰 TV 앞에 앉았다. 이제 뉴스는 스마트폰으로 소비된다. 유튜브와 온라인 플랫폼이 뉴스 유통의 중심이 되면서 지상파가 정보를 독점하던 시대는 사실상 끝났다. 시청자는 언제든 다른 플랫폼으로 이동한다. 신뢰를 잃은 매체는 빠르게 외면받는다.

이런 시대에는 '공영방송'이라는 이름만으로 존재 이유를 인정받을 수 없다. 영향력이 줄어든 만큼 더 높은 수준의 공정성과 독립성을 증명해야 한다. 정부와 국회가 추진하는 통합미디어법도 결국 이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작업이다. 방송과 통신, 온라인 플랫폼을 하나의 체계로 재편하려면 무엇보다 공영과 민영의 역할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 공영방송은 공적 책무에 걸맞은 책임과 규율을 감당하고, 민영방송과 플랫폼은 시장 경쟁 속에서 자율성과 창의성을 최대한 보장받는 구조가 바람직하다.

'공영은 공영답게, 민영은 민영답게.' 이 단순한 원칙이 바로 서야 통합미디어법도, 미디어 규제 혁신도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공영방송이 그 책무를 감당할 자신과 의지가 없다면 공영의 이름을 계속 유지할 명분도 약해진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제도를 앞세운 또 한 번의 사장 교체 쟁탈전이 아니다. 권력과 자본, 진영 논리로부터 독립해 왜 한국 사회에 여전히 공영방송이 필요한지를 스스로 증명하는 일이다. 공영방송의 미래는 정치가 아니라 국민의 신뢰가 결정한다.

이상복 시대 논설위원 겸 미디어랩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