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파운드리와 배터리 사업 반등을 위해 분투하고 있다. 사진은 미국 선밸리 콘퍼런스 참석을 위해 이동하고 있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모습. /사진=뉴스1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파운드리와 배터리 사업 부진을 끊기 위해 글로벌 기업들을 상대로 직접 세일즈에 나서고 있다. 가시적인 성과가 이어지는 가운데 두 사업이 긴 적자의 터널을 벗어날 수 있을지 주목된다.
29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지난 24일(현지시각) 미국 샌프란시스코 '더 미드웨이'에서 열린 'AI 서밋'에서 브로드컴과 차세대 AI 인프라 구축을 위한 전략적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협약식에는 한진만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장(사장)과 혹 탄 브로드컴 최고경영자(CEO) 등 양사 경영진이 참석했고, 이재명 대통령 방미 일정과 맞물려 이 회장도 자리를 함께했다. 양사는 2030년까지 5년간 메모리와 파운드리 분야에서 2000억달러(약 293조원) 이상 규모의 전략적 협력을 추진한다.

HBM4·HBM4E 등 차세대 메모리를 공급하는 동시에 2나노 이하 첨단 공정과 첨단 패키징으로 브로드컴의 차세대 AI 반도체 생산을 맡는다. 재계에서는 30년 넘게 TSMC에 생산을 의존해온 브로드컴을 고객군에 끌어들인 점에서 삼성 파운드리의 첨단공정 가동률과 수익성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번 협약 체결에는 이 회장의 미국 현지 세일즈가 주효했다고 평가된다. AI 서밋에 앞서 이 회장은 이번달 초 한진만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장 사장과 미국 아이다호주에서 열린 선밸리 콘퍼런스를 찾았다. 브로드컴을 비롯해 아마존, 메타 등 빅테크 수장들이 한자리에 모인 만큼 두 사람은 신규 고객사 확보와 파운드리 협력 확대를 타진했을 것으로 관측된다.

이 회장이 직접 세일즈에 나선 배경으로는 파운드리 사업부의 장기 부진이 지목된다. 파운드리 사업부는 2022년 이후 4년 넘게 적자가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모바일용 반도체에 치우친 사업구조와 첨단공정의 기술 완성도·수율에 대한 우려로 AI·고성능컴퓨팅 분야의 대형 고객사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사이 급증한 AI 반도체 물량은 TSMC에 집중됐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전년 동기보다 1.2%포인트(p) 하락한 6.5%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TSMC 점유율은 72.3%로 올라 양사의 격차는 65.8%p까지 벌어졌다.

브로드컴과의 협약에 앞서서도 이 회장은 주요 반도체 기업 경영진을 잇따라 만났다. 지난 3월에는 리사 수 AMD CEO와 만나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삼성전자는 AMD의 차세대 AI 가속기 '인스팅트 MI455X'에 HBM4를 우선 공급하고 차세대 제품 파운드리 협력 가능성도 검토하기로 했다. 5월에는 대만 팹리스 업체 미디어텍 본사를 찾아 릭 차이 CEO 등 주요 경영진과 회동했다. 양측은 반도체 공급망과 파운드리 협력 확대를 모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장은 삼성SDI의 실적 반등을 위해서도 직접 뛰었다. 삼성SDI는 전기차 수요 정체(캐즘) 여파로 2024년 4분기 2567억원의 영업손실을 내며 적자로 전환한 뒤 올해 1분기까지 6개 분기 연속 적자를 이어갔다. 2분기도 흑자 전환은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 전망치(컨센서스)에 따르면 삼성SDI는 올해 2분기 356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할 전망이다.

배터리 사업의 부진을 끊기 위해 이 회장은 지난 3월 최주선 삼성SDI 대표이사 사장과 유럽 출장길에 올랐다. 두 사람은 메르세데스-벤츠를 비롯한 복수의 유럽 완성차 업체 경영진과 만나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이 회장이 그룹 차원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해 삼성SDI의 배터리 수주를 직접 지원한 것으로 분석된다.

유럽 출장 약 한 달 뒤인 4월 20일 삼성SDI는 서울에서 메르세데스-벤츠와 차세대 전기차용 배터리 다년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삼성SDI가 벤츠에 전기차 배터리를 공급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구체적인 계약 기간과 물량, 금액은 공개되지 않지만 다년 계약이라는 점을 고려해 공급 규모가 최소 수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삼성SDI는 이번 계약으로 기존 BMW·아우디에 이어 벤츠까지 확보하며 독일 프리미엄 완성차 3사를 모두 고객사로 두게 됐다. 고객 기반을 넓힌 만큼 중장기 가동률과 수익성 개선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파운드리와 배터리 모두 고객사 공급망에 진입하면 장기간 거래가 이어지는 만큼 이번 성과는 긍정적인 신호"라며 "이 회장의 행보가 두 사업의 반등을 앞당기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