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이 칼럼(6월 27일자)에서 '그래미는 월드컵이 아니다. 안(못) 타도 된다'고 썼다. 현실이 됐다. 방탄소년단 멤버들이 7월 29일, "저희는 올해 그래미에 출품하지 않기로 했다"고 직접 밝혔다. 멤버들은 "음악이 지역이나 언어로 구분되기보다 음악 그 자체로 들리고 사랑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며 "늘 함께해 주는 아미와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고 덧붙였다.
방탄소년단의 이번 그래미 보이콧 결정은 한국 문화사의 쾌거다. 아니, 세계 음악사의 입지전이다. 그래미에 반기를 든 이는 수십 년 전부터 많았다. 영미권 아티스트들이다. 사회적 분위기나 현상이 그래미의 변화를 이끌 때도 그 무대는 물론 '본토', 미국이었다. 2020년 미니애폴리스의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블랙 라이브스 매터' 운동이 일어났다. 그래미 부문 명칭 중 '어번(urban)'도 인종차별적이란 여론이 형성됐다. 결국 그래미는 수정했다. 이번엔 어떤가. '저 멀리' 아시아의 '일개' 아티스트가 보이콧을 통해 뉴욕타임스도 움직이는 강력한 파장을 일으켰다. 이번 사건은 일찍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중심으로 재편된 대중문화 패권이 수십년 만에 붕괴되는 소리다. 뉴 미디어 혁명을 통한 권력의 이동과 분산이 '팍스 아메리카나 쿨투라에(Pax Americana Culturae)를 무너뜨리는 파열음이다.
'인종차별 타파의 아이콘, 우리의 BTS!' 같은 대의적 시선으로만 이번 사안을 보기엔 그래서 너무 아깝다. 오래된 인권 운동 말고 새로운 산업 대전으로 봐야 재밌다. 일단 이것을 '그래미 내의 파워 게임'으로 조망해 보자. '그래미 vs. BTS' 구도가 아니다. 실은 방탄소년단도 그래미다. 멤버 일곱 명 모두 이미 수년 전부터 그 어렵다는 그래미 정회원이다. 그런데 2만 명에 달하는 그래미 위원회(미국 리코딩아카데미) 내부엔 일종의 계급이 존재한다. 일단 이번 아시아 팝 부문 신설처럼 범주와 제도를 정비하는 소위원회가 있다. 그리고 각종 사안을 최종 승인하는 42명 규모의 전국 이사회(National Board of Trustees)가 있다.('내셔널'이란 로컬적 명칭에 주목!) 일종의 최고 회의다. 수십 명이 이미 그래미 정회원인 방탄소년단과 소속사는 '내부자'로서 진작에 움직일 여지가 있었다. 소위원회가 열리고 의견 수렴 과정이 있을 때 말이다. 다만 힘 싸움에선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이번 보이콧은 그래미 내부의 가망 없는 싸움을 외부로, 공론장으로 확전시킨 전략적 묘수다. 방탄소년단이야말로 소셜 파워의 최강자 아닌가. 더구나 '라틴 팝'이란 테두리가 때론 못마땅할 중남미에도 막강한 팬덤을 가졌다. 변화하는 세계 문화 지도에서 아시아와 중남미를 틀어쥔 채 미국 중심주의에 대항하는 판을 짤 '천하삼분지계' 비슷한 묘책…. 이번 선언으로 방탄소년단은 체급을 키웠다. 고작 트로피 하나의 무게를 뛰어넘는 무형의 '국제 영향력' 트로피를 스스로 만들어 즉각 안았다.
그래미랑 영영 척질 일도 없다. 2021년 캐나다 가수 더 위켄드는 큰 인기와 예술적 평가에도 그래미에선 후보 지명조차 받지 못하자 사실상 '영영 보이콧'을 선언했다. 말도 방탄소년단처럼 예쁘장하게 하지 않았다. "그래미는 여전히 부패해 있다"고 직격했다. 그래미는 진화에 나섰다. 결국 '영원한 보이콧'은 철회됐다. 더 위켄드는 2025년 그래미 시상식 축하 무대에, 그것도 그래미 회장의 직접 소개로 '깜짝' 등장해 화려한 복귀식을 치렀다. 비슷한 일이 없으리란 법 없다. 그래미가 방탄소년단에게 '감동적 복귀-본상 시상' 시나리오를 언제든 들이밀 수 있다. 드라마는 언제나 잘 팔린다. 이것도 전략, 저것도 전술이다. 중요한 건 실용이다.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바둑돌을 던져버린 게 아니다. 중원에서 한참 벗어난 허를 찌르는 곳에 착점했다. '독립 만세!' 같은 해피엔딩은 없다. 영원히 안 끝나는 흑백의 게임에서 승패는 집수로 결정된다.
다른 생각할 거리도 있다. 뒤집어 보면 '아시아 팝 부문' 신설은, 특히 '아시아 언어로 된 노랫말'이란 단서는 수많은 아시아 아티스트에게 되레 희망이 될 수도 있다. 미국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 굳이 어려운 영어로 녹음한 방탄소년단 같은 선구자 선배들이 개척한 길 위에서, 뒤에 올 아시아 후배들은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자국어로 뛰어난 작품을 만들면 된다. 일단 아시아 부문을 받은 뒤 그래미 본상으로, 세계 1위 시장(미국) 안쪽으로 진군하는 거다. 이를테면 필리핀 그룹 BINI가 타갈로그어로만 노래를 만들어도 꿈의 그래미를 노려볼 수 있게 됐다. 올해 그래미 최고상을 받은 푸에르토리코의 배드 버니를 비롯한 수많은 라틴 팝 가수가 간 길이다. 1위 사업자가 전체 사업자의 마음과 꿈을, 현재와 미래를 대변할 수는 없다. 새로운 실리적 기회를 노리는 다른 수많은 아시아 아티스트의 생각도 차제에 들어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다시 말하지만 팝은 산업이다. 중요한 건 언제나 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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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희윤 대중문화평론가: 전 동아일보, 헤럴드경제 기자. 현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국립국악원 운영자문위원, YTN 시청자위원. 저서 '예술기: 예술과 기술을 이야기하는 8인의 유니버스', '망작들 3: 당신이 음반을 낼 수 없는 이유',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총괄 기획 및 공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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