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버넘 영국 총리(오른쪽)가 지역 유권자들과 함께 자신의 정책인 '모든 버스 요금(상한선)을 2파운드로'라는 문구가 적힌 버스를 바라보고 있다. 버넘 총리는 교통비와 전기요금 등 생활비 경감을 핵심 정책 목표로 내세우고 있다. /로이터=뉴스1

지난 7월 20일 취임한 앤디 버넘(56) 영국 총리가 소박한 정치적 '실험'에 나서고 있다. 좌파인 노동당 소속인데도 거창한 이념이나 장밋빛 청사진, 자극적 구호가 아닌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되는 '생활 정치'를 외치고 있어서다.

대표적인 생활 정치 사례가 각종 정치 행사에서 '모든 버스요금을 2파운드로'를 대표 구호로 내세우고 '생활비 부담 경감'을 대표 정책으로 내걸고 있는 것이다. 현재 영국의 상당수 지역은 3파운드(약 6000원)가 버스 요금 상한선인데 이를 런던 등 일부를 제외하고 2파운드(약 4000원)로 낮추겠다는 것이다. 매달 40~60파운드(8만~12만원) 정도의 교통비를 절감하게 해주는 정책이다. 버넘은 저렴한 버스요금 유지를 위해 현재 맨체스터에서 실시하는 버스 공영제의 전국 확대를 추진 중이다.


<생활 정치, 탈중앙 정치로 영국에 새로운 바람>
버넘 총리의 생활 정치가 화제를 모으는 이유는 '모든 버스 요금을 2파운드로'를 비롯해 '전기요금 부가세 폐지' '공공주택 공급 확대' 등 대중이 피부로 실감할 수 있는 정책을 골라서 추진하고 있어서다. 공공교통·수도·전기 등 공공시설의 공적관리에 무게를 두고 서민 부담을 줄이려고 시도하고 있다. 아울러 실업교육을 강화해 청년층이 교육을 통해 실업에서 벗어나도록 정부 차원에서 지원할 방침이다. 영국 서민들의 사랑방인 퍼브에 대한 세금도 줄이기로 했다. 주민들에게 필요한 돈을 나눠주는 현금복지 대신 서민들의 생활과 생업에 원활하도록 선별 감세 등으로 간접 지원하는 형식이다.
앤디 버넘 영국 총리가 열차 제조업체인 알스톰을 방문해 작업복 차림으로 청년 실업을 줄일 실업교육 강화 방침을 밝히고 있다. /로이터=뉴스1

버넘이 펼치는 '중앙정부 권한의 적극적인 지방정부 이양'과 '지방 성장' 정책도 눈길을 끈다. 영국에서 남부와 북부 간의 격차와 이에 따른 지역 갈등은 심각한 정치 현안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런던을 비롯한 잉글랜드 남부 지역은 금융, 서비스, 첨단 산업이 집중돼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국제화됐다. 반면 맨체스터·리버풀 등 잉글랜드 북부는 1980년대 이후 전통의 제조업과 석탄 산업이 무너지면서 쇠락하고 있다. 이러한 산업 구조 차이는 지역 간 경제적 격차와 정치 성향의 분화로 이어져 왔다. 북부에선 남부 런던 중심의 국가정책 결정에 소외감과 반감을 느끼면서 불만이 쌓이고 있다. 이에 따라 정치 성향도 남부는 보수당이, 북부는 노동당이 우세를 보여왔다.
버넘은 남북 격차 해소의 첫걸음으로 자신이 10년 가까이 광역단체장으로 있던 영국 2대 광역자치단체인 북부 그레이터 맨체스터에 취임 직후 제2 '다우닝가 10번지(총리실)'의 문을 열었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그는 주택·전력·수도 등 생활 관련 행정을 이곳에서 처리하기로 했다. 국민의 실생활에서 벌어지는 불만을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청취하고 이를 정책으로 추진해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생활 정치다. 상대적으로 부유하고 인프라가 잘 갖춰진 수도 런던이 아닌 영국이 안고 있는 문제점과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지방에서 문제 해결 방안을 찾는 현장 행정을 하겠다는 것이다.
앤디 버넘 영국총리가 잉글랜드 북부 맨체스터에 마련된 제2 다우닝가 10번지(총리 관저)'의 개소식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제2 총리관저는 중앙권력 지방 분산책의 일환이다. 이곳에선 주로 서민 관련 정책을 다루게 된다. /로이터=뉴스1
<생활, 지역, 서민 중심의 '맨체스터주의'로 전국적 주목>
특히 문제는 주택이다. 공급 부족으로 월세가 올라 청년층을 중심으로 생활물가고를 호소하며 정부를 원망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어서다.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에 따르면 버넘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공공주택 건설을 추진 중이다. 이를 통해 서민의 집세 부담을 낮추고, 전체 생활비 부담을 줄이기 위한 적극적인 맞춤형 정책을 생산하고 있다. '생활 정책''지역 중심''서민과 현장 중심'의 실용적 대중 리더십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BBC방송 등 영국 미디어는 이러한 버넘의 정책과 업무 스타일을 '맨체스터주의'라는 부르고 있다. 맨체스터에서, 지역 주민과 함께 만들고 실천을 시작한 정치적 도전이라는 의미에서다.
물론 재정 마련 등 논란도 있다. 하지만 부유한 지역 중심, 엘리트 중심, 구호 중심의 정치가 아니라 권력의 지방 분산, 생활 정책 중심, 서민을 포함한 전체 국민 중심의 리더십은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버넘은 그레이터 맨체스터 시장 시절 '앤디에게 무엇이든 물어보세요(ASK ANDY ANYTHING)'라는 옥외 유튜브 방송을 진행했다. 주민이나 민원인, 전문가의 요구를 현장에서 직접 경청하며 일문일답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를 통해 사람이 사람을 위해 하는 생활 정치의 힘을 보여줬다. 비방·언어폭력에 적통·배신자 등 공허한 프레임이 판치는 한국적 정치 상황에서 눈여겨볼만한 사례다.
앤디 버넘 영국총리(오른쪽)이 노인들을 보살피는 요양원을 찾아 거주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보건부 장관도 지낸 버넘 총리는 부친이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고 밝히면서 노인요양 정책에 많은 관싴을 보이고 있다. 초고령화 사회를 맞아 노인요양은 서민들이 가장 아쉬워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로이터=뉴스1
<서민 집안-케임브리지대-하원의원-광역시장-총리…버넘이 걸어온 정치 역정>
버넘 총리는 정치 이력부터 독특하다. 영국 총리실 홈페이지에 따르면 버넘은 전화 기사인 아버지와 진료실 접수원인 어머니를 둔 서민 가정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대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그 뒤 신문·잡지 기자와 의원·장관 보좌관을 거쳐 2001년 고향에서 가까운 맨체스터 리 지역구에서 처음으로 하원의원에 당선했다. 이후 2017년까지 만 15년 이상 하원의원으로 재직하면서 문화부 장관과 보건부 장관을 각각 지냈다. 총리 취임 직후 "부친이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다"며 요양원을 찾아 근무자를 격려한 것도 이러한 이력과 관련이 있다.
시련도 적지 않았다. 2019년과 2015년 두 차례에 걸쳐 당 대표에 도전했지만 각각 4위와 2위를 기록했다. 온건 좌파인 그는 노동당 내에서도 비주류였던 셈이다. 당 주류와의 갈등 끝에 2017년 하원의원을 그만두고 신설된 그레이터 맨체스터 시장에 당선해 지역에서 제2 정치 인생을 시작했다. 그레이터 맨체스터는 맨체스터시 등 10개 지방자치단체를 합친 광역자치단체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프리미어 축구클럽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맨체스터 시티가 이 광역자치단체 안에 터를 잡고 있다.

하지만 취임 2주 뒤인 2017년 5월 22일 맨체스터 아레나에서 열린 아리아나 그란데 콘서트에서 자살 폭탄 테러가 터졌다. 대부분 어린이인 22명이 숨지고 수백 명에게 부상을 입힌 비극이었다. 당시 버넘 시장은 침착하게 집중력을 발휘해 신속하게 사고를 수습하고 24시간 만에 추모행사를 열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이런 종류의 테러 공격은 대체로 분열을 초래하고 지역사회를 더욱 어렵게 만들지만, 버냄의 차분한 대처는 오히려 지역주민과 시 정부, 시장이 하나가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시장으로서 그는 노숙자 수를 절반 이하로 만들겠다는 공약을 제시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꿀벌 네트워크(Bee Network)'라는 공공 운송 사업도 돋보인다. 버스를 공공기관에서 운영하고, 요금 상한제를 도입하며, 지역 대중교통 시스템을 간결하게 통합한 버넘의 대표 치적이다.
앤디 버넘 영국 총리(가운데)가 21일 열린 첫 내각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버넘의 첫 내각은 각료 28명 중 남녀 비율이 동일하다. 영국에서 남녀가 동수로 구성된 내각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치안과 이민 등을 담당하는 내무부 장관에 처음으로 여성 무슬림 정치인이 기용됐다. /로이터=뉴스1
<코로나 봉쇄 당시 서민 입장 대변하고 '북부의 왕' 별명>
버넘이 영국에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것은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보리스 존슨 총리의 중앙정부 하향식 봉쇄 조치에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면서다. 경제적 형편이 런던 같은 남부보다 열악한 북부 주민들은 봉쇄에 따른 고통이 더욱 심하다는 지역 주민의 여론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셈이다. 그는 북부 지역에 대한 공정한 재정 지원을 요구하며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처음으로 영국 국민 대다수의 의견을 대변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평가됐다.
가디언은 버넘이 이를 통해 '북부의 왕'이라는 정치적 별명을 얻었다고 지적했다. 단순한 남부와 북부라는 지역적 차이를 넘어 상대적으로 인프라와 산업이 열악한 지역, 가난하고 중앙정부의 일방적인 지시에 좌절감을 느끼는 지역 주민의 민심을 경청하고 대변하는 지도자로 떠오른 것이다. 그런 버넘은 초당적으로 지지를 끌어냈다. 시장으로 내리 3선을 기록할 정도였다. 노동당보다 개인 인기가 더 높아졌다.
앤디 버넘 영국 총리. 그가 시도하는 탈이념, 탈중앙의 생활정치 실험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로이터=뉴스1
'북부의 왕'이 주는 상징적인 이미지는 그를 시장에서 의회로 불러낸 원동력이 됐다. 2024년 노동당이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고도 경제실적 부진, 취약계층 복지 축소 논란, 당내 정쟁 등으로 키어 스타머 당시 총리의 인기가 급락하자 전국적인 지명도와 인기를 가진 버넘이 새 지도자로 부상했다. 그는 시장을 그만두고 지난 6월 치러진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하면서 의회로 복귀했다. 이어 당내 경선에서 무투표로 당 대표에 추대되고 총리가 됐다. '웨스트민스터 시스템'으로 불리는 영국식 의원내각제에선 집권당 대표가 곧 총리가 된다.
버넘은 의원·장관과 광역자치단체장에 이어 총리로서 세 번째 정치적 도전을 하고 있다. 비주류 정치인 버넘의 도전은 우월 의식에 가득 찬 기득권 엘리트 정치인에게 주는 신랄한 경고일 수 있다. 버넘의 도전은 막스 베버(1864~1920)가 1919년 펴낸 『직업(소명)으로서의 정치(Politik als Beruf』에서 제시한 '열정·책임감·균형감각'이라는 정치가의 덕목을 떠올리게 한다. 거창한 이념이나 구호 대신 생활 정치를 들고나온 버넘은 이 세 가지 덕목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 가뜩이나 지난 10년 새 7명의 총리를 맞는 등 정치 지도자의 단명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는 영국에서 버넘이 어떤 역량을 발휘해 생존할지 주목된다.
영국 총리 관저인 다우닝가 10번지에 10년 전인 2016년 입양된 고양이 래리.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부터 이번 앤디 버넘 총리까지 7명째 총리를 맞고 있다. /로이터=뉴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