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심 빌딩숲 사이로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 양손에 화분을 쥐고 분주히 걸어간다. 노인들의 손에 들린 것은 축하 화환으로 대부분 기업체의 사무실로 배달하는 것이다.


노인들은 다른 배달 영역에서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카드나 서류 배달부도 어느샌가 노인들이 많아진 것이다. 이뿐이 아니다. 주유소의 주유원이 이미 환갑을 훌쩍 넘긴 노인들인 경우도 있다. 고령화사회로 접어든 대한민국의 한 단면이다.
 

사진 류승희기자
 
일하는 노인들, 왜 늘어나나
 
일하는 노인이 증가한 것은 '100세 시대'의 불가피한 현상이다. 60대, 70대가 돼도 여전히 건강한 노인들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레 은퇴 후에도 '제2의 직업'을 찾는 노인들이 많아졌다.
 
핵가족화 역시 일하는 노인이 늘어난 이유 중 하나다. 정종보 한국노인인력개발원 국장은 "핵가족화에 따라 젊은 사람들의 부양의식이 약화된 것도 한 원인"이라며 "예전에 대가족이 함께 살 땐 노인이 생활비에 대한 부담을 갖지 않았지만 세대가 분화됨에 따라 자신의 생활비를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이유로 일하는 노인 인구는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의 자료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의 22.5%(약 114만명)가 일자리를 희망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노인들이 일을 하려는 이유는 생계비 및 용돈마련이라는 응답이 68.2%로, 건강유지(16.4%), 시간활용(9.4%) 등의 의견을 압도했다.

일자리를 갖지 못한 70.09%(355만명)의 노인 중에서도 32.2%인 114만명이 향후 일할 의지가 있는 것으로 나타나 앞으로 일하는 노인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노인 일자리, 어디서 찾을까
 
문제는 일자리의 수급불균형에 있다. 노인이 가진 능력과 기업체가 필요로 하는 능력이 불일치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정종보 국장은 "우리나라의 주요 산업직군인 IT업계는 변화가 빨라 노인이 일하기 어렵다"며 "그나마 일할 수 있는 곳이 유통이나 서비스업체에 한정돼 있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계속 쏟아져 나올 노인 일자리에 대한 대안은 없을까. 정 국장은 인력난을 겪고 있는 중소업체나 서비스업체와 같은 틈새 노동시장에 관심을 가져볼 것을 조언했다.
 
정 국장은 "기업이 손해를 보면서까지 노인을 채용할 수는 없기 때문에 노인들 역시 일정수준 이상의 직무능력을 갖출 필요가 있다"며 "고령자 눈높이에 맞는 재취업 교육을 통해 고도화되는 기업의 직무능력에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한국노인인력개발원에서는 고령자 인턴십 제도를 통해 노인 취업의 문턱을 낮추고 있다. 정 국장은 "기업체들은 고령자를 가장 부담스러워 한다"며 "인턴제도를 시행하면 기업은 고령자가 제대로 일할 수 있는지 등을 확인해볼 수 있고 고령자는 직무에 적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노인 일자리, 지자체와 기업 도움 절실

노인의 일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지자체와 기업의 도움이 절실하다. 현재 지자체를 중심으로 노인 일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홍은종합사회복지관, 서대문노인종합복지관, 광진노인종합복지관 등은 활동성이 있는 노인들에게 일자리를 지원해 노인의 경제활동을 돕고 있다. 주요 일자리는 역시 택배사업이다.
 
홍은종합사회복지관의 '은빛배달부' 사업은 어르신들이 꽃, 서류 등의 소화물을 지하철로 배달하는 사업이다. 고령자들의 지하철 이용이 무료이기 때문에 운송비용이 저렴하고, 노인이 배달하기 때문에 낯선 사람을 경계하기 쉬운 가정배달도 안심하고 맡길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은빛배달부에 속한 15명의 노인은 순번을 돌아가며 하루에 1~2건 정도 배달한다. 60세 이상의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달에 근무시간을 60시간으로 제한해 30만원 안팎의 월 급여를 제공한다.
 
이밖에 홍은종합사회복지관에서는 어르신들이 어린이집에서 어린이들을 보살펴주는 '은빛 보듬이케어', 몸이 불편한 어르신들의 집에 가서 돕는 '은빛사랑나눔', 아이들의 급식을 보조해주는 '은빛행복밥상'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관내에서는 도담카페테리아를 열어 어르신이 직접 제조한 음료를 판매해 수익을 얻고 있다.
 
서대문노인종합복지관은 기업체인 현대택배와 함께 아파트택배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현대택배에서 소화물을 아파트 단지에 배송해 놓으면 실버 배달부가 집집마다 소화물을 배달하는 것이다. 어르신들의 수입은 한달에 받는 정부 보조금 11만원에 물건을 배달할 때 받는 수익을 합쳐 지급된다.
 

양재선, 채수원, 황성규씨(왼쪽부터)
사진 류승희기자
 
메가박스에서 만난 시니어 인턴 3人
"출근 자체에 만족… 더 건강해진 느낌"
 
메가박스는 지난해 10월부터 시니어를 대상으로 한 인턴십을 진행 중이다. 젊은 사람들이 주고객인 극장에 이례적으로 60세 이상의 시니어들이 표를 받고, 입퇴장안내 및 정리 등의 업무를 맡고 있는 것이다. 메가박스 코엑스점에는 현재 시니어인턴십을 진행하고 있는 4명의 실버스텝과 1, 2기 인턴십을 통해 장기 고용된 7명의 시니어 스텝이 함께 근무하고 있다.
 
이곳에서 만난 채수원 씨(72)와 양재선 씨(66)는 인턴을 거쳐 장기고용된 상태고, 황성규 씨(68)는 현재 인턴을 하고 있다. 이들은 현역시절에는 각각 대학교 행정실장, 전산실장, 파출소장 등을 지낸 쟁쟁한 경력을 갖고 있다.

"예전에 하던 일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단순업무지만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서 일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일을 하겠다는 의지와 능력은 있는데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하지 못하는 것은 아쉬운 일이죠."
 
채수원 씨의 말이다. 그는 "매일 일정하게 출근하는 것 자체에 만족한다"고 기쁜 기색을 내비쳤다. 아무래도 60∼70대 노인이 젊은이처럼 장시간 일하는 것은 무리가 따를 터. 채씨도 시니어 인턴을 시작하던 초반에는 힘이 들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몸이 더 건강해진 느낌이라며 미소지었다.
 
젊은 사람과 일하는데 어려움은 없을까. 양재선 씨는 오히려 시니어가 가진 연륜으로 업무 중에 생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답했다.
 
"3D안경을 미처 준비하지 못해 한 중년여성이 젊은 직원에게 호통을 치고 있었죠. 그 직원은 결국 울면서 어쩔 줄을 모르더라고요. 제가 가서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였더니 높은 사람이 와서 인사하는 줄 알고 금세 화를 푸시더라고요.(웃음)"
 
시니어를 위한 일자리는 경제적인 것뿐 아니라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소속감도 안겨준다. 황성규 씨는 "보수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며 "사회의 한 일원으로서 젊은이들과 함께 일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31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