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작은 나라인 키프로스에서 발생한 금융위기로 유럽 주식시장이 크게 흔들렸고 전세계 시장도 긴장했다. 키프로스경제가 유로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0.2%에 불과하지만 디폴트를 선언하고 유로존을 탈퇴할 경우 '나비효과'에 의해 글로벌경제도 타격받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지난 2일에는 키프로스정부와 국제채권단 트로이카(EU,·ECB,·IMF)가 구제금융 조건에 최종합의 함으로써 미국과 유럽 등의 주식시장이 큰 폭으로 반등했다.
필자의 지인은 몇년 전 한국에서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온가족이 키프로스로 떠난 적이 있다. 건강상의 문제로 어쩔 수 없이 귀국하게 됐는데 지난해 만난 그 지인으로부터 키프로스에 대해 여러 얘기를 듣게 됐다. 필자는 키프로스란 국가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고 수도 이름이 니코시아라는 것까지도 알고 있었지만, 키프로스섬이 한반도처럼 남북으로 분단돼 있고 남쪽은 그리스계, 북쪽은 터키계가 지배하고 있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키프로스는 우리나라와 유사점이 많다. 유럽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인 점, 침략전쟁의 요충지로서 식민지시대 수난의 역사가 있다는 점, 영국 해군기지가 있고 터키와 러시아와의 관계에서도 정치·군사적으로 민감한 지정학적 환경에 있다는 점 등이 그렇다.
키프로스는 언론에 잘 등장하지도 않던 국가이기 때문에 상당수 사람들은 이 나라에 대해 잘 모를 것이다. 포털업체 다음의 '텐인텐' 등 경제 카페 회원들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 284명중 60%가 지중해에 키프로스섬이 있는지 몰랐다고 답했다.
◆응답자 절반이상 키프로스섬 몰라
지중해의 동쪽, 터키의 남쪽에 위치한 키프로스섬은 지중해에 있는 섬들 중에서 시실리, 샤르데냐에 이어 세번째로 크다. 경기도보다는 작은 면적으로 인구는 100만명가량이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에 속하는 <오셀로> 의 배경이기도 하다.
약소국들은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한국도 약소국들과 경제적으로 이해관계를 갖는 사례가 늘고 있다. 근래 몇 십년 사이 독립한 약소국들이 크게 늘어나 지구촌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만큼 이들에 대한 관심을 높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사회문제 중 하나인 일자리 문제만 하더라도 국내에서만 일자리를 구할 것이 아니라 해외로 눈을 돌린다면 부지런하고 솜씨 좋은 한국인들이 일할 수 있는 곳은 얼마든지 있다.
◆美의 女神 비너스가 탄생한 곳
그리스 서사시인 헤시오도스의 비너스 탄생기를 보면 태고의 천공신 우라노스의 아들 크로노스가 아버지와 싸우다 아버지의 성기를 잘라 바다에 던져버린다. 잘린 우라노스의 성기가 바다를 떠다니다가 그 주위에 거품이 일어나면서 커다란 조개가 솟아오른다. 조개는 바람타고 표류하다 키프로스섬 서쪽 파포스 해안에 닿게 된다. 조개껍질이 열리면서 아름다운 나체의 처녀가 일어서는데, 그가 미와 애욕의 여신인 비너스(아프로디테)다. 이 장면은 보티첼리의 유명한 그림인 '비너스의 탄생'에도 묘사돼 있다.
이외에도 키프로스를 배경으로 한 신화가 많을 정도로 키프로스는 신들의 섬이라 할 수 있다. 3000년 전부터 사람들이 살았다는 점은 신석기·청동기시대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오래된 문화·종교 유적이 풍부하며 키프로스 해안가에는 하루 숙박비가 수천유로에 달하는 5성급 호텔들이 흩어져 있다. GDP의 20%를 관광산업이 차지하며 한해 관광객 수는 인구보다 훨씬 더 많다.
키프로스섬은 알지만 독립국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키프로스는 유럽·아시아·아프리카 세 대륙을 연결하는 곳에 위치한 섬이라는 지정학적 특성으로 인해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동시에 군사적 요충지도 돼 여러 나라에 의해 돌아가며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리스, 이집트, 앗시리아, 페르시아, 알렉산더제국, 로마, 사라센, 십자군, 베니스공화국, 오스만제국이 차례로 통치를 했다.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 터키인들이 북부지역에 대규모로 이주한 것이 오늘날 섬 주민의 18%를 터키계가 차지하게 된 계기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터키가 독일 편을 든 후유증으로 키프로스는 승전국인 영국의 식민지가 됐다. 그리스계 주민들은 그리스정교회를 주축으로 영국에 맞서 독립투쟁을 벌였다. 2차 대전 이후 식민지들이 독립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1960년이 돼서야 영국·그리스·터키 3국 간 '런던협정'을 통해 독립했다. 런던협정은 그리스계와 터키계 간 권력분점을 규정한 것으로, 1974년까지 대통령은 그리스인, 부통령은 터키인이었다.
그러나 그리스계 정부가 그리스와의 합병을 추구하고 터키계와의 권력공유를 명시한 헌법을 개정하려고 시도하면서 그리스계와 이슬람계의 분쟁이 강화됐다.
독립은 했지만 그리스계와 터키계의 갈등이 무력충돌 내전으로 이어지자 유엔에서는 평화유지군을 파견해 치안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리스계 군부에 의해 쿠데타가 발발하면서 터키군이 섬에 진주, 북쪽을 점령했다.
이로써 작은 섬은 남북으로 분단됐고, 키프로스 북부는 1983년 터키의 지원을 받아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국제사회에서는 그리스계 키프로스만 국가로 인정했고, 북키프로스는 오직 터키에서만 국가로 승인한 상태다.
한반도의 분단은 이념이 다른 것에 기초하지만, 키프로스의 분단은 민족(그리스 vs 터키), 문화(서양 vs 동양), 종교(그리스 정교회 vs 이슬람)가 다른 분열에 해당한다. 2004년 유엔 사무총장이 중재안을 냈지만 터키가 철군을 거부하고 그리스계도 중재를 거부해 무산되면서 분단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통일안에 대한 국민투표에서 북키프로스는 64%의 주민이 찬성했지만 남키프로스는 75%가 반대해 키프로스 통일을 위한 유엔의 중재는 무위로 돌아갔다. 니코시아에서 남북 키프로스간 거리는 도보로 10분밖에 되지 않는다. 정말 멀고도 가까운 사이다.
◆14번째 EU 가입국
1998년 11개 유럽연합 회원국이 모여 통화 단일화에 대한 규범을 마련한 후 유로존이 출범했다. 키프로스는 2008년 14번째로 가입했다. 단, 북키프로스터키공화국은 해당되지 않는다. 유로화를 사용하는 유로존 국가는 현재 17개국, 총 인구 3억2300만명에 달한다.
키프로스 인구는 유로존 인구의 0.24%에 불과한 77만명이다. 키프로스 경제는 관광산업에 대한 비중이 절대적이었으나 유로존에 가입한 뒤 새로운 성장동력원으로 금융산업을 정책적으로 집중 육성했다. 금융부문은 국내총생산(GDP)의 45%, 고용의 70%를 담당하는 수준으로 성장했으며, 은행권 자산규모는 GDP 대비 750%까지 늘어나 유럽 최고수준이 됐다. 키프로스의 비대해진 은행은 결국 화근이 되고 말았다.
인구가 적고 산업체가 빈약해 내수시장이 작은 키프로스에서 은행이 고수익을 올릴 수 있는 길은 마땅치 않았고, 자연스레 해외로 눈을 돌렸다. 키프로스가 EU에 가입하자 은행은 동일 통화를 사용하는 유로 채권시장에서 채권을 쉽게 매입할 수 있게 됐다. 이에 따라 그동안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왔고 국가경제에서 의존도가 높은 그리스의 국채를 대규모로 사들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가 유로존 재정위기의 주범이 돼 IMF 등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조건으로 국채의 75%가량을 손실상각하면서 키프로스 은행은 45억유로(약 6조4000억원)에 이르는 손실을 입게 됐다.
결국 신용평가기관들은 키프로스 은행들의 신용등급을 정크 수준으로 내렸고 키프로스 국가신용등급도 추락했다. 지난 3월16일에는 EU와 IMF가 100억유로 규모의 구제금융을 제공하기로 결정해 그리스, 아일랜드, 포르투갈, 스페인에 이어 다섯번째 구제금융 국가가 됐다. 유로그룹은 이에 대한 조건으로 키프로스측에 예금 과세를 요구했다.
키프로스 은행 예치금의 3분의 1은 러시아 자금이 차지하고 있다. 해마다 100억~200억달러의 예금이 러시아로부터 들어온다. 키프로스는 몇십년 간 러시아 부자들의 세금 도피처 역할을 했던 것이다. 러시아 기업들은 키프로스에 주식회사를 만들고 페이퍼 컴퍼니를 날조했다.
키프로스가 돈벌이를 위해 러시아 재벌, 마피아의 검은돈, 글로벌 핫머니의 탈세를 도와줬으므로 경제가 휘청이게 된 것을 인과응보라고 할 수도 있다. 키프로스에서 이탈하게 될 자금을 유치하기 위해 카리브해의 케이맨 제도 등 또 다른 조세피난처들이 유혹의 손짓을 보내고 있다는 설이 있다. 라트비아나 몰타 등도 물망(?)에 오르고 있다. 과거에는 세금 도피처로 스위스와 싱가포르 등이 유명했지만 지금은 보안이 철저하면서 페이퍼 컴퍼니를 두기 쉬운 작은 나라들이 인기를 끌기 때문이다.
◆막대한 양의 천연가스 매장
키프로스 섬 남부 연안에는 천연가스가 120조 ft³(세제곱피트) 매장돼 있는데, 이는 전세계가 한해 동안 쓸 수 있는 양에 달한다. 현시세로는 4400억달러(약 480조원)에 이른다. 남키프로스는 미국, 이스라엘 등과 천연가스 개발 계약을 추진하면서 북키프로스는 배제했다.
북키프로스의 후견자 역할을 하는 터키는 남키프로스가 천연가스를 단독으로 개발한다면 해군을 파견하겠다며 엄포를 놓았다. 우리나라에서는 한국가스공사가 이탈리아 최대 에너지기업인 에니(ENI)와 함께 2·3광구의 천연가스 개발에 나서고 있다.
성공적으로 개발되면 국내 연간 소비량의 2배 수준인 6000만t(톤)의 천연가스를 확보하게 된다. 이는 11조원에 달하는 규모다. 키프로스의 시리키오티스 무역관광 장관은 원유 역시 매장됐을 가능성을 언급한 바 있다. 막대한 양이 매장된 천연가스는 키프로스가 근래 겪게 된 경제난을 해소하는 데 효자노릇을 할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