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의 최고 경지는 생명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불가능한 과제이자 목표인줄 알면서도 우리는 생명공학 또는 생명과학 등의 이름으로 생명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어느 누구도 죽은 벌레 한 마리조차 살려내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아직 누구도 생명의 첫 심장을 뛰게 하지 못한다.
유일하게 생명을 창조하는 존재는 바로 어미다. 모든 것의 어미들은 유일하게 생명을 잉태하고 창조하는 바탕이다. 살아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유일한 존재는 바로 어머니다. 그래서일까? <생명이 자본이다>의 저자는 생명의 시를 ‘어머니’로 시작한다. 저자 이어령 선생은 어머니에 대한 각별한 기억이 있는 듯하다. 어린 시절 병환으로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이 어머니라는 존재를 생명을 창조하는 위대한 존재로 만든 건지도 모를 일이다.
책의 제목은 역설적이다. 자본주의라는 경제시스템은 현재 사회문화적으로 생명을 살리기보다는 생명을 파괴하는 쪽에 가깝기 때문이다. 더 많이, 더 풍족하게 살기를 원하는 인간의 본원적인 욕망에 맡겨진 수요와 공급의 자동조절은 인간마저 서로 죽이고 돈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든다. 이런 상황에서 생명이 자본이라니. 80세 노학자의 생각이 더욱 궁금해진다. 더군다나 <디지로그>와 같은 저작을 통해 아날로그의 감수성에 디지털의 기술을 접목해 새로운 문화와 경제의 시대를 이야기해온 문화평론가가 아니었던가. 그의 역설적 표현에 더욱 주목하게 되는 이유다.
경제가 단순히 먹는 물질과 관련될 때 더 이상은 경제 구실도 못한다. 그러니까 먹거리는 형이하에서 보이지 않는 형이상의 가치로까지 확산되고 고양될 때 그 진정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먹거리가 볼거리가 되고, 볼거리가 생각거리와 사랑거리로 변해 마지막에는 초월적인 신과 소통하고 결합하는 종교단계의 ‘예배거리’로까지 업그레이드된다.
경제, 쉽게 말해서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그의 생각은 한 차원 높은 데 있다. 먹고 사는 문제에만 천착하는 것은 결국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는 먹고 살아야 하는 주체, 인간 그 이상의 생명을 목적으로 하는 형이상항적인 문제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여기서 그가 말한 역설적인 제목인 ‘생명이 자본이다’가 성립된다.
특히 지속적인 경제 성장, 활성화를 위한 창조의 원리가 생명에 있음을 그는 '줄탁동시'(啐啄同時)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어미가 밖에서 쪼는 것과 동시에 병아리가 안에서 쪼아야 비로소 알을 깨고 나올 수 있다는 말이다. 자신이 가진 자원이 근간이 되는 경제인 자본주의(資本主義)라는 말과 생명이 합쳐지면, 결국 생명이 모든 자원의 근간이 되는 경제가 되는 것이다.
생명의, 생명을 위한, 생명에 의한 경제. 즉 주체도 목적도 방법도 모두 생명으로 귀결되는 경제가 그가 말하는 생명자본주의일 것이다. 오늘날 본말이 전도돼 자본을 위해 수많은 생명이 희생돼야 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경종을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