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14일 개정된 공정거래법이 시행됐다. 작년 10월 개정안이 입법 예고된지 4개월여만이다. 통상 공정거래법은 1년에 한 번 정도 개정되는데 박근혜 정부 들어 벌써 3차례나 바뀌었다. 기업질서를 바로잡겠다는 새 정부의 의지가 그만큼 강하다는 뜻일 터다.
이번에 수정된 공정거래법을 둘러싼 관심은 재벌의 ‘일감 몰아주기’ 규제 조항에 쏠린다. 해당 법에 따르면 자산총액 5조원 이상의 총수가 있는 대기업집단은 총수 일가에 부당한 이익(일감 몰아주기)을 제공할 수 없다. 금지규정이 적용되는 거래 상대방 범위는 총수·친족이 발행주식 총수의 30%(비상장사는 20%) 이상을 소유한 계열사다.
하지만 이 법의 시행을 앞두고 일부 대기업에선 총수일가의 ‘지분정리’ 작업이 속속 진행됐다. 그룹 회장이나 그 자녀들이 계열사의 지분을 매각해 지분율 총합을 30%가 안되게 ‘임의로’ 조정한 것. 이 때문에 이들 기업은 ‘일감 몰아주기’ 규제를 피하기 위해 꼼수를 부렸다는 비난에 휩싸였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현대백화점그룹이다.
/사진=머니위크 류승희 기자 ◆ 0.62% 지분에 정몽근 회장家 '웃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정몽근 현대백화점그룹 명예회장은 지난해 12월10일 보유 중이던 계열사 현대그린푸드의 주식 252만7527주 가운데 60만주를 매각, 자신의 지분율을 2.59%에서 1.97%로 낮췄다.
한달 전인 그해 11월만 해도 현대그린푸드가 금융감독원에 제출한 분기보고서를 보면, 최대주주인 정교선 현대백화점그룹 부회장(차남)의 지분율은 15.28%,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장남)은 12.67%, 그리고 부친인 정몽근 명예회장의 지분율은 2.59%로, 총수일가의 지분율 합계는 30.5%였다. 하지만 정 명예회장의 지분매각으로 총수일가 지분율은 29.92%로 떨어졌다.
정 명예회장이 0.62%포인트 자신의 지분율을 낮추면서 결국에는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규제 기준인 '지분율 30%'를 간신히 벗어나게 된 셈이다.
업계 관계자는 “‘30%’룰을 정한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지난해 10월1일 입법 예고됐고 시행 시점이 올 2월이라는 점을 감안해 현대백화점 오너일가가 사전에 지분정리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현대백화점그룹 측은 “정 명예회장의 지분 매각은 개인적인 자금 수요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고 일축했다.
◆ 매년 약 15% '몰아주기' 여전
그렇다면 현대백화점그룹은 계열사인 현대그린푸드에 매년 얼마나 일감을 몰아줬을까.
식자재 유통, 기업 단체급식 등의 사업을 하는 현대그린푸드는 현대백화점의 식품매장에서 판매하는 생식품과 채소 일부, 가공식품 등을 공급한다. 지난해 이 회사의 단독 총 매출액은 1조2000억원으로 추정되는데 이 중 17% 정도가 그룹사와의 거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 금융감독원의 공시자료에 따르면 현대그린푸드는 지난 2010년 이후 현대백화점그룹 내부거래 비중을 13~14% 수준으로 유지하고 있다. 2010년 내부거래 총액은 1414억원으로 한해 전체 매출액의 14.23%를 차지했다. 2011년에도 현대백화점그룹을 통해 1776억원 매출을 올려 13.29%의 내부거래 비중을 기록했다. 2012년 역시 내부거래 매출은 2135억원을 기록했는데, 이는 한해 매출(1조1680억7800만원)의 18.28%에 이르는 금액이다.
특히 현대그린푸드는 현대백화점 외에 다른 핵심 계열사인 한무쇼핑과 현대쇼핑 등과의 내부 거래 비중도 크다.
지난 2009년 26억원에 불과했던 한무쇼핑과의 거래액은 2010년 47억원에 이어 2011년에는 2009년치보다 14배나 많은 359억원으로 크게 늘었다. 2012년에도 457억원을 몰아주며 내부거래 최대치를 경신했다. 2012년 현대쇼핑과의 거래에서도 현대그린푸드는 2009년(7억원) 대비 20배 늘어난 150억원의 매출을 올린 바 있다.
한편 현대백화점 오너 일가는 현대그린푸드 외에도 현대홈쇼핑, 한섬, 리바트 등 다른 35개 계열사의 지분율도 모두 30%를 넘지 않고 있다.
'일감몰빵' 이어 순환출자 규제도 운좋게 피했다?
일감 몰아주기를 ‘자의’에 의해 피해갔다면 현대백화점그룹은 정부의 또 다른 경제민주화 정책인 순환출자금지와 관련해서도 ‘운’이 좋은 케이스다. 지난해말 관련 법안이 ‘신규만 금지하고 기존 출자고리는 인정’하는 방향으로 확정돼 국회를 통과한 덕분이다.
이에 따라 현대백화점그룹으로선 순환출자고리 해소비용을 최대 6000억원 가량 절감할 수 있게 됐다.
기업경영성과 평가 사이트인 CEO스코어에 따르면 현대백화점그룹은 ‘현대백화점→현대쇼핑→현대그린푸드→현대백화점’으로 이어지는 순환출자고리를 끊는 데 최대 4426억원의 비용이 소요된다. 순환출자를 끊으면서 현재의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현대그린푸드가 보유한 현대백화점 주식 281만9226주(12.05%)를 매입해야 한다.
또 다른 순환출자고리인 ‘현대백화점→현대쇼핑→현대그린푸드→현대A&I→현대백화점’을 끊기 위해서는 최대 1584억원이 필요한 것으로 CEO스코어는 추산했다. 현대A&I가 보유하고 있는 현대백화점 주식수는 100만8900주(4.31%)다.
결과적으로 현대백화점그룹은 순환출자를 통해 총수 일가의 지배력을 강화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기존 순환출자까지 인정됨에 따라 큰 어려움 없이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현대백화점그룹은 지난 2월27일 경청호 부회장이 대표이사직을 내놓고 고문으로 물러나면서 정지선 회장의 친정체제로 전환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