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삼례양곡창고였다. 잊고 싶은 역사와 함께 버려질 뻔 했던 창고들이 예술 공간으로 바뀌었다. 오래된 7개의 건물 각자가 아름답거나 새롭거나 창의적인 이야기를 담아가고 있는 ‘삼례문화예술촌’으로 간다.
◆아픔도 상처도 낡은 것도 예술이 되다
튀는 돌이 정 맞는다 했다. 삼례는 평화롭기엔 위치가 평범하지 않았다. 만경강이 흐르고, 서울로 가는 길목이고, 주변엔 기름진 호남평야가 펼쳐져 있다. 삼례는 조선시대 역참이었다. 동학농민군은 이곳에서 2차 봉기를 일으켰고, 일제강점기엔 철도가 놓였다. 그렇게 호남지방 쌀 수탈의 거점이 됐다. 일제는 1920년에 양곡창고를 지어 이 일대에서 생산된 쌀을 쌓아 두었다. 사람들은 농사짓는 노역에 시달렸지만 정작 쌀 한 톨도 먹지 못하고 그대로 일제에게 빼앗겨 버렸다. 창고가 비옥해 질수록 배를 곯는 이들의 눈물은 처절했다. 일제는 이곳에 모아 놓았던 쌀을 삼례역을 통해 군산까지 기차에 실어 보냈고, 군산에서 배에 실어 일본으로 가져갔다.
어찌보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곳이다. 곡물창고 몇동, 노란색 농협마크 같은 건 시골길을 걷다 흔히 만나게 되는 풍경이다. 그런데 이 오래된 건물들이 변화의 역사를 품고 있다. 일제가 쌀 보관과 수탈을 위해 창고를 꽤 공들여 지었었나 보다. 습기가 차지 않도록 나무를 일정하게 붙여 공간을 띄운 점이나 높은 천장, 크고 단단한 창고문, 환기시설 등이 이후에도 창고로써의 몫을 제대로 감당했다. 그래서 2010년까지만 해도 농협의 곡물창고로 쓰이던 건물들이다. 이들은 1920년대에 지은 6동과 1970년대에 지은 1개동으로 구성돼, 100년에서 4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벽이 시멘트로 된 것은 일제 강점기 때 지은 것이고, 빨간 벽돌로 지은 것이 그 이후에 지은 건물이다. 뒤로는 붉은 벽돌의 삼례성당이 보이는데 1955년에 완공됐다고 한다. 가운데 우뚝 솟은 종탑과 양쪽의 첨탑, 소박한 아치형 문이 전형적인 옛날 성당의 모습을 하고 있다. 마치 삼례문화예술촌과 한 공간을 이룬 듯, 일관성 있게 어우러져 있다.
이것이 끝인가. 과거는 지나갔고, 창고는 쌀 아닌 다른 것을 담기 시작했다. 낡은 벽, 벗겨진 시멘트, 녹슨 철문, 오래된 표식들…. 진정 빈티지한 이 공간은 예술가들이 매력을 느끼기에 충분한 곳이다. 창고는 갤러리가 됐고, 쌀 대신 아트를 담기 시작했다.
김상림목공소
비주얼미디어아트 미술관
◆보는 예술, 하는 예술
제일 먼저 보이는 건 비주얼미디어아트미술관이다. 입구의 정면에서 마주치는데 때에 따라 썼다 지운 건물 이름과 구호의 흔적이 남아 세월을 말해주고 있다. 가로로 길게 붙여놓은 사다리, 그 위로 철장을 덧입힌 창문, 그 위로 슬레이트 지붕, 그 위로 햇빛이 떨어진다. 수명을 다한 창고 같지만 입구를 찾아 들어가면 전혀 다른 세상이 열린다. 가장 낡고 오래된 듯한 건물을 가장 현대적인 미술로 채웠다. 메시지를 담은 조소작품, 동영상, 설치미술 등이 전시관 곳곳에 자리잡았는데 원래 창고를 이루고 있는 나무 서까래와 벽면의 구조물이 작품의 일부가 됐다.
학교 종 3개가 맞이하는 곳은 목공소다. 인사동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던 김상림 소목장 역시 이 공간에 반해 터를 잡았다고 한다. 그런데 ‘소목장’이라는 용어가 낯설다. 이는 건물을 만드는 ‘대목장’과 대조되는 호칭으로 가구나 집기를 만드는 장인을 일컫는 말이다. 입구에 들어서자 십여명의 사람들이 마주 서서 날을 가는데, 전시실을 다 둘러볼 때까지 이 조용한 작업은 끝날 줄을 모른다. 이곳에서 일을 하는 분들인가 조심스럽게 여쭤보니 목수학교 학생들이라고 한다. 이렇게 시작되는 진지한 작업이 도구와 연장, 재료를 대하는 자세부터 바르게 잡아주는 듯하다. 실제로 작품 하나하나가 섬세하고 부드러워 아무 곳에나, 아무렇게나 두어서는 안 될 것만 같다.
책박물관에서는 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한국 북디자인 100년’이라는 제목으로 지난 한세기 동안의 책 표지를 한곳에 모았다. 1884년 궁중에서 발행했다는 달력인 ‘갑신력’에서부터 ‘국민학교’ 시절의 교과서, 잡지, 소설 등 책 표지 디자인의 변천사를 보는 동안 마치 그 책들을 다 읽은 듯한 착각에 빠진다. 본 건물에서 나오면 외벽을 이용한 작은 도서관이 마련되어 있다. 아직도 ‘농협’ 마크가 선명한 ‘제 2호문’ 앞에 자리잡은 모던한 디자인의 책걸상이 이곳을 집약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듯 하다.
책공방북아트센터에서는 책이 만들어 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일일이 자음과 모음을 맞춰야 하나의 글자가 완성되는 식자, 옛날 만화가 생각나는 그림판 등을 보고, 판화체험을 통해서는 인쇄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 가죽 표지로 책을 묶어 보는 등 아이들과 해 볼만한 체험 프로그램이 있어 가족 여행자에게 인기가 많은 곳이다.
디자인뮤지엄에서는 최신의 생활디자인을 만난다. 창의적 아이디어가 실제 사용되는 제품 속에 녹아든 작품들로, 하나씩 들여다 보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구매욕구가 생긴다. 그러고 보니 ‘마음을 움직이는 디자인’ 이란 게 이런 게 아닌가 싶다.
이곳엔 일본 전통가옥도 한채 있다. 예술촌 입구 쪽에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창고 관리인이 쓰던 건물이라고 한다. 지금은 인포메이션 사무실과 세미나 실로 쓰고 있다. 모든 전시실은 체험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어서 미리 사이트를 통해 확인하고 가면 시간을 더 알차게 계획할 수 있다.
삼례문화예술촌 ◆여백이 곧 휴식이다
반전이다. 얼핏 바깥에서 볼 땐 ‘뭐 대단한 게 있을까?’ 싶었는데, 허술한 창고, 투박한 문을 지나면 무엇에 홀린 듯 시간이 휙 지난다. 그것도 공간마다 다른 매력으로 관객의 발목을 잡는다. 특히 좋은 건 틈틈이 자리한 빈 공간이다. 주의 깊게 봐야 보이는 작은 무대도 있고 한번씩 의자도 있다. 꽉 채운 느낌이 아니라 헐렁한 여유다. 한때 이곳은 습지여서 개구리, 두꺼비, 맹꽁이가 많이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곳곳에 귀여운 배불뚝이 조형물들이 자리잡고 있다. 한번씩 맹꽁이 옆에 앉아 관람으로 과열된 머리를 식히는 것도 좋다.
문화카페 ‘오스’는 이름처럼 ‘문화’라는 말이 썩 잘 어울린다. 커다란 마리오네트를 연상하게 하는 목제 인형, 가끔 콘서트가 열리는 듯한 빈 마루와 공간을 가르는 얕은 담 위에 놓여진 사발들…. 진공관 앰프와 창고의 나무 서까래가 따뜻한 조화를 이룬다. 밝으면서도 그늘진 공간이다. 커피 한잔을 놓고, 창을 통과하는 동안 한층 부드러워진 햇빛 바라기를 하며 여행에 쉼표를 준다. 시간이건 공간이건 여백이 있어야 쉼이 있고, 쉼이 있어야 채움을 기대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이곳을 자랑하기 위해 수상경력이나 문화유산을 보태진 않겠다. 눈 있는 사람은 볼 것이고, 누릴 줄 아는 사람은 다시 찾게 될 것이다. 연출하지 않은 빈티지, 꾸미지 않은 이야기, 모조가 아닌 진짜…. 여기 삼례문화예술촌은 실체로 즐기는 아트갤러리다.
[여행 정보]
● 삼례문화예술촌 가는 법 [승용차] 경부고속도로 - 천안논산고속도로 - 호남고속도로 - 삼례나들목로 - 삼례IC 사거리에서 ‘우석대학교, 삼례’ 방면으로 우회전 - 웃삼례길 - ‘방촌마을’ 방면으로 좌회전 - 방촌길
[대중교통] 버스: 삼례공용버스터미널 - 111번 버스 - 삼례역 정류장 하차 기차: 삼례역 하차 - 도보 이동
< 음식 > 문화카페 The O’s: 커피 빌리지 조성을 목표로 삼례문화예술촌 안에 위치한 카페다. 로스팅체험에서부터 바리스타 기초, 취미, 전문가 과정 등 교육 프로그램과 로스팅 대회, 바리스타 대회 등을 개최하고 있다. 커피 3000~4000원 / 허브차, 아이스티 3500원 / 호박죽 5000원 농가레스토랑 비비정: 깔끔하고 모던한 레스토랑이지만 마을 어머니들의 농가밥상을 선보이는 친환경 로컬음식점이다. 시골정식 1만2000원 / 비비세트 1만5000원 / 정세트 2만원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음 삼례리 768 / 063-291-8609
< 숙박 > 거인산촌마을펜션: 통나무집 펜션에서 글램핑까지 즐길 수 있도록 다양한 숙소가 마련돼 있고, 세미나실, 바비큐장, 야외수영장 등을 갖추고 체험 프로그램도 할 수 있는 생태마을이다. www.mttown.com / 전라북도 완주군 동상면 신월리 430 문의전화: 063-245-6611 숙박요금: 5만~30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