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매사추세츠대학에서 무선네트워크를 공부하고 국내 대기업 계열 IT서비스업체에 입사해 수석연구원까지 지내다 돌연 퇴사, 보안벤처로 옮긴 후 좌절을 맛보고 6년 후 다시 문서보안(DRM) 전문 보안벤처 부사장으로 영입돼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다진 여성 리더가 있다.

2000년 설립된 파수닷컴의 안혜연 부사장. 그는 삼성SDS에서 함께 일하다 벤처회사를 창업한 조규곤 파수닷컴 대표와의 인연으로 한식구가 됐다.

대기업과 벤처를 경험하며 근 20년간 보안업계에 몸담아 온 그를 상암동 소재 파수닷컴 사무실에서 만나봤다. 기자와 만난 안 부사장은 자기 분야에서 성공하기 위해 여성들이 어떻게 내공을 쌓아가야 하는지 명쾌하게 설파했다.



/사진=류승희 기자
◆'재미 찾아' 대기업서 벤처로

안 부사장의 벤처 라이프는 '재미'에서 시작됐다.

안 부사장은 "대기업에 있다보니 관리적 일만 하게 돼 재미가 없더라. 보안 솔루션 개발에 집중하는 기업에서 일하고 싶었다. 삼성SDS는 몇억짜리 보안 솔루션 만들어서 파는 것보다는 몇백억짜리 프로젝트에 더 관심을 쏟는 기업이기 때문에 내가 좀 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의 이동을 결심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안 부사장의 '벤처 인생'이 마냥 재밌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소위 '너 죽고 나 죽자' 식의 경쟁이 벌어지는 국내 B2B 패키지 솔루션시장의 녹록지 않은 환경이 문제였다.

안 부사장은 "국내 IT시장에서 B2B 솔루션으로 먹고 산다는 게 참 힘들다는 것을 실감했다"며 "당시 네트워크 보안제품인 파이어월을 개발했는데 그로부터 1~2년만에 국산제품 23개가 시장에 난립하는 상황이 벌어졌다"고 보안벤처 A사 재직 시절을 회고했다.

이어 그는 "솔루션시장이 크지도 않은 나라에서 수많은 제품들이 연구개발 투자 없이 1년 만에 뚝딱 만들어지고 고객사 수준도 A급과 C급 제품을 구분할 정도가 안 되다 보니 업체간 단가 경쟁만 벌어졌다"며 혀를 찼다.


시장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파수닷컴에서 뒤바뀌었다. 조규곤 파수닷컴 대표가 안 부사장에게 러브콜을 보낸 것. 때는 파수닷컴의 전공인 콘텐츠·문서에 대한 보안이 시스템·네트워크 보안에 이은 차세대 보안 기술로 주목받기 시작하던 시기다.



안 부사장은 "이 기술은 파이어월처럼 1~2년 안에 20여개 제품이 뚝딱 나올 수 있는 차원의 제품이 아니기에 해볼만 하다고 판단했다"며 "실제로 2006년 DRM을 하는 회사가 3곳밖에 없었는데 10년이 지난 지금도 이 분야 업체는 여전히 파수닷컴, 마크애니, 소프트캠프뿐이다"고 설명했다.


◆파수닷컴 '큰 언니'의 목표는 '멘토'

안 부사장 합류 당시 60여명이 전부였던 파수닷컴은 현재 250명 규모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 중 여사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23%. 안 부사장은 이들의 큰 언니이자 멘토다.

조직 내에서 고군분투하는 여직원들을 보면 과거 자신의 모습이 오버랩돼 '정신적 버팀목'이 돼주고 싶다는 마음이 절로 생긴다는 것.

"글로벌 기업은 아무래도 일로만 평가를 하는데, 로컬 기업들은 평가에 있어 일 이외의 변수들이 너무 많이 개입된다"며 "(지위가) 올라갈수록 일이 아닌 '정치'에 리소스를 소모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 이외의 변수로 저평가되는 여직원들이 한없이 안타깝다는 안 부사장은 "마음먹고 하면 여자들도 네트워킹을 통해 직급을 올리는 '정치'를 못할 것 없지만 권하고 싶지 않다"며 "대신 돈(연봉), 직급으로 남자들과 게임하려고 하지 말고 내가 승부해야 할 세상이 뭔지 빨리 판단하라고 조언한다"고 얘기했다.

여직원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장수할 수 있는 법은 본인이 가진 경쟁력이 무엇인지 분명히 아는 데서 출발한다고 그는 강조한다. 타사 여후배가 전해줬다는 에피소드를 들으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여후배가 남자 사장과 함께 미국 출장을 갔는데 동행한 남자 임원이 사장 옆에 붙어서 '입안의 혀'처럼 굴더라는 것. 여후배는 그러한 광경을 보고 '내가 할 게 아무 것도 없구나'라고 느꼈다는 것이다.

안 부사장은 이 여후배에게 "우리 여자들은 그런 걸로 죽었다 깨나도 (남자들을) 못이긴다"며 "기본적으로 그 사장이랑 같이 사우나를 갈 수가 없다. 우리는 '실력'이라는 다른 무기를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사장의 비서가 되지 말고, 사장이 '아웃풋'을 낼 수 있도록 시장 트렌드에 대해 공부해가라는 얘기다.

안 부사장이 여직원들에게 주문하는 것이 또 있으니, 뻔뻔해지고 배짱도 두둑해지라는 것이다. 안 부사장은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 의사를 분명히 표현하지 못하고 약해지는 여직원들이 많은데, 싫은 것을 싫다고 얘기할 수 있는 배짱을 길러야 한다"며 "또한 지를 줄도 알고 베팅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 우선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부터 스스로 정립하라"고 역설했다.

조직이 안정화 단계에 접어든 지 오래인 지금, 이제 안 부사장은 후배를 키운다는 사명으로 출근한다. 어려움과 부족함이 보이는 이들에게 지금보다 더 성장할 수 있고 능력을 펼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는 게 본인의 일이라 생각한다.

더 나아가 안 부사장은 '풀타임 멘토'를 꿈꾼다. 종래에는 사회환원 차원에서 순수한 봉사의 개념으로 멘토링을 하고 싶다는 게 그의 소박한 꿈이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3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