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리는 결국 비극을 낳았다. 납품업체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던 철도시설공단 수도권본부 이모 부장(51)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부장은 지난 17일 오전 6시30분쯤 대전 대덕구 대청댐 주차장의 BMW 차량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으며, 당시 차량엔 불씨만 남은 번개탄이 있었다. 이 부장은 유서를 통해 "이미 내 잘못을 자백했는데 검찰이 윗선 연관성을 추가 조사하겠다고 해 힘들다. 큰 건을 잡아야 출세하나 보다. 아내와 아들아, 잘 살아라…."라는 말을 남겼다.
이 부장은 고속철사업과 관련해 납품업체로부터 수억원을 받은 혐의(뇌물 수수 등)로 최근 검찰조사를 받았고, 숨진 당일 오후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앞두고 있었다. 검찰은 최근 '관피아(관료+마피아) 척결' 수사의 신호탄으로 대전의 한국철도시설공단 본사를 압수수색했다. 철도시설공단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죽음 부른 철도공단의 대형 납품비리
숨진 이 부장이 연루된 'CCTV 영상전송장비'는 선로에 설치된 CCTV 영상을 역사와 중앙관제센터로 보내는 일종의 중계장비 및 부품으로, 이번 사업에 190억원 상당이 납품됐다. 그러나 1개 업체가 사실상 독점 납품했고 이 과정에서 가격을 3~4배 부풀렸다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됐다.
이에 대해 검찰은 지난 5월 CCTV 영상전송장비 제조업체인 A사 대표 최모씨(44)와 공사설계를 맡은 설계회사의 임원 김모씨(49)를 구속했다. A사 대표 최씨는 59억원 상당의 CCTV 영상장비(23개 품목)의 가격을 190억여원으로 부풀려 공단에 납품한 사실이 드러났다. 최씨는 사업이 발주되기 전부터 설계회사 임원 김씨를 매수해 자사 제품만 독점 납품될 수 있는 설계를 청탁했다고 검찰은 전했다. 김씨는 검찰에서 "최씨로부터 매월 400만~500만원씩 2년여 동안 모두 1억여원을 받았다"고 자백했다.
검찰 관계자는 "철도시설공단과 설계회사가 설계단계부터 A사 제품만 통과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고, 공개입찰을 통해 정해진 시공사는 선택의 여지없이 A사가 요구하는 대로 제품을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검찰은 철도시설공단과 감리회사, A사 제품의 판매영업을 맡은 B사 등에 대해서도 수사를 벌이고 있다.
숨진 이 부장은 한국철도시설공단에서 CCTV 영상 관련 업무 책임자로 이번 사건의 핵심 피의자 중 한명이었다. 검찰 관계자는 "이 부장은 A사 직원의 어머니 명의로 된 '대포폰'을 이용해 A사와 설계회사 사이에서 각종 정보를 흘려주는 중계역할을 한 것으로 조사됐다"고 말했다. 이 부장은 또 A사 제품의 판매대행사인 B사로부터 4억원을 받아 70평 규모의 식당을 차리고, 또 다른 업체로부터도 외제승용차 1대와 국산승합차 1대를 받았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조사를 받았다.
지난달 28일 ‘관피아 척결’ 의지를 밝힌 검찰이 납품비리 혐의를 받고 있는 한국철도시설공단을 압수수색했다. /사진제공=뉴스1 장수영 기자 ◆빙산의 일각… "재수 없어 걸린 것"
이 부장은 지난 20여년 동안 철도공단에 몸담아 왔다. 철도시설공단과 코레일이 분리되기 전 철도청이었을 때부터 재직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철도와 함께 해왔다. 이러한 그가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을 두고 철도 관련 업계에서는 안타까워하고 있다. 조직문화가 그를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몰았다는 것이다.
철도업계 관계자는 "철도라는 게 특수한 분야인 데다 업체도 한정적이다. 특히 철도시설공단의 경우 감독업무도 수행하고 사업발주자인 탓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고 직원들 스스로가 공단 내에서 카르텔을 이뤄 움직인다"며 "납품비리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어느 특정인의 부정에 의해 일어난 것도 아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오래전부터 관행처럼 이어진 납품비리가 하필이면 재수 없게도 세월호 참사와 엮이면서 수면 위로 올라왔다"며 "어떻게 보면 이 부장의 자살은 철도시설공단이라는 조직이 만들어낸 참사"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도 "개인적으로 이 부장을 아는데 그는 철도시설공단의 시각에서 보면 절대 부정한 사람이 아니다"며 "그냥 몇십년 전부터 이어온 관행의 피해자일 뿐"이라고 말했다.
◆수십년간 이어온 '철피아' 비리, 왜 못 끊나
이 부장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몬 '철피아'(철도+마피아)의 비리와 폐해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검찰은 지난 5월 철도시설공단 사무실과 서울에 있는 납품업체, 관계사 및 사건 관련자 주거지 등을 대상으로 압수수색에 나선 데 이어 최근에는 삼표그룹에 대해서도 사정의 칼날을 뻗쳤다.
6월 초 검찰은 철도부품업체를 주력계열사로 보유한 삼표그룹의 오너 일가를 출국금지했다. 철도 궤도공사 부품 납품과정에서 회사 돈을 빼돌려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를 포착하고 집중조사하고 있다. 또한 검찰은 현재 김광재 전 이사장을 비롯한 한국철도시설공단의 전·현직 임직원을 대상으로 한 수사도 진행 중이다. 거의 모든 사업과 철도시설공단의 전·현직 임직원들이 수사 대상인 셈이다.
철피아의 비리는 과거에도 검찰에 의해 수차례 적발됐다. 검찰은 지난해 10월 KTX 납품비리 수사를 통해 업체 관계자와 철도시설공단, 한국철도공사 직원 등 9명을 구속기소하고 5명을 불구속기소하기도 했다. 특히 이 가운데 납품 편의를 봐주는 대가로 업자로부터 2000만원의 뇌물을 받은 한국철도공사 차량기술단 팀장 양모씨(51)는 지난해 11월 1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이밖에도 지난 4월에는 한국철도기술연구원(철도연) 소속 연구원 권모씨가 시험성적서 위조 혐의로 구속기소된 바 있다.
이처럼 계속해서 드러나는 철피아의 끊이지 않는 비리. 도대체 어디서부터 얼마나 비리로 얼룩진 것인지 가늠조차 안된다. 또 다른 비리가 끔찍한 비극을 낳지 않도록 이번 기회에 정부가 철저히 조사하고 조직을 개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