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일모직공업주식회사’. 제일모직의 첫 이름이다.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은 지난 1953년 제일제당을 세운 뒤 이듬해 자본금 1억환(2500만원)을 들여 직물사업에 뛰어들었다. “국산 양복지를 만들어 내겠다”던 이 회장의 원대한 꿈이 첫발을 내딛던 순간. 하지만 소비자 반응은 싸늘했다. “비싸도 외제가 좋다”는 인식이 팽배했던 탓에 사업은 적자를 면치 못했다. 그로 부터 2년 뒤 제일모직은 첫 옷감인 ‘장미표 골덴텍스’를 시장에 내놓는다. 골덴텍스는 입소문을 타고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제일모직 상징을 만들어냈다. 제일모직은 그렇게 제일제당·삼성물산과 함께 삼성그룹의 ‘젖줄’이 됐다.
그렇게 성장한 제일모직이 삼성물산과의 합병으로 61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오는 9월1일이면 ‘제일모직’이라는 간판은 내려가고 ‘삼성물산’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된다. 삼성의 창업정신을 계승하고 글로벌 인지도를 고려해 사명을 결정하게 됐다는 게 제일모직 관계자의 설명. 다만 삼성측은 제일모직이 가진 상징적 의미를 감안해 제일모직이라는 브랜드 명을 사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사진=머니투데이 이동훈 기자 ◆제조업의 원조… 숨가빴던 61년
제일모직은 그간 그룹 내에서 실질적인 근간으로 통했다. 고 이병철 회장은 세상을 뜨기 전까지 제일모직의 등기이사직을 유지할 정도로 애정이 각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역시 마찬가지. 이 회장은 지난 1987년 취임 이래 2005년까지 제일모직 등기이사로 재직했다.
업계에서는 제일모직이 두 회장의 애정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삼성이 처음으로 진출한 제조업이자 60년이 흐른 지금까지 설립 당시 이름을 유지해왔다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가 있다고 본다.
제일모직이 걸어온 길도 곧 새로운 역사였다. 제일모직은 ‘골덴텍스 신화’를 일으키며 한국 섬유산업의 새 장을 열었다. 지난 1961년에는 양복에 쓰이는 천을 국내 최초로 해외에 수출했고 1965년 국내 최초로 울마크 사용권을 획득했다.
1975년 유가증권시장에 상장했고, 1978년 여자 탁구팀을 창단해 이수자, 양영자 등의 스타 선수를 배출하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패션사업에 진출해 ‘빈폴’과 ‘갤럭시’ 등의 브랜드를 탄생시키며 패션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 덕에 1996년 매출 1조원을 돌파했다. 그즈음 ‘아이비클럽’이라는 학생복사업으로 대박을 쳤지만, 1997년 중소기업에 사업권을 양도했다. 1999년에는 삼성물산이 갖고 있던 패션사업까지 양도받아 키워냈다.
1990년대에는 케미컬 사업에 진출하며 혁신을 거듭했다. 엔지니어링 플라스틱을 생산하는 합성수지사업으로 변신에 성공했으며 2000년에는 섬유업종에서 화학업종으로 업종변경하면서 반도체, 디스플레이, 기능성 소재 등 첨단 제품을 개발했다.
결과는 대 성공. 지난 2002년 처음으로 케미컬 사업부 매출이 패션사업을 앞질렀고 2010년에는 전자재료 사업부까지 치고 올라오면서 패션사업부는 3위로 밀려났다. 화학과 전자재료 사업부문은 제일모직 내에서 점차 덩치를 키워나갔다. 제일모직은 더 이상 ‘단순 패션회사’가 아니었다.
지난 1955년 준공된 제일모직 대구공장 본관 모습. /사진제공=제일모직 ◆주력 업종 바꾸다 '합병 1순위'
변화는 즉각 이뤄졌다. 지난 2013년 9월 제일모직은 패션부문을 삼성에버랜드에 양도하고 전문기업으로 변신했다. 매각대금은 1조원. 승계를 위한 사전 작업이란 해석이 흘러나왔지만 이 역시 성공적인 결실을 맺었다.
제일모직은 지난 2013년 기준 임직원 3711명에 매출 4조1111억원을 올리는 기업으로 성장했고 이 중 화학사업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63.4%(2조7945억원)이며 나머지 36.6%(1조6166억원)는 전자재료 사업부문에서 나왔다.
주력 업종이 자주 바뀌다 보니 합병 등 구조조정 대상에 자주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지난해 7월에는 삼성SDI가 제일모직을 흡수합병하며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가 삼성에버랜드가 제일모직으로 사명을 바꾸며 되살아났다. 삼성에버랜드의 매출 절반 이상이 패션사업부문에서 나올 정도로 주력 사업이라는 게 주된 이유였다.
삼성에버랜드 /사진=머니투데이 홍봉진기자 ◆현 제일모직은 ‘삼성에버랜드가 모체’
따라서 현재의 제일모직은 삼성에버랜드로 사명을 변경한 1963년 동화부동산으로 설립된 회사다. 이 회사는 1968년 안양컨트리클럽 개장, 1976년 자연농원(현 에버랜드) 개장 등 부동산·테마파크사업을 시작했던 곳. 이후 1977년 빌딩관리사업부(현 건설사업부)를 발족한 뒤 1994년 FS(Food Service) 사업부 신설 등을 통해 건설·식음서비스로 사업영역을 확장했다.
1997년 10월 삼성에버랜드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꾼 뒤 2013년 제일모직으로부터 패션사업을 인수하고 사명을 제일모직으로 변경했다. 현재의 제일모직은 ▲패션사업부문 ▲건설사업부문 ▲레저사업부문으로 구성돼 있으며, 주력 사업은 패션사업부문이다. 패션부문은 지난 1분기 기준 제일모직 전체 매출의 56%를 차지한다.
제일모직은 창업주가 1954년 설립을 시작으로 삼성에버랜드를 모체로 하기까지의 61년 역사를 뒤로하고 사라질 위기에 놓였지만 이번 합병을 통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양사의 핵심사업인 건설, 상사, 패션, 리조트, 식음 등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기반을 마련했다.
제일모직 관계자는 “양사가 각각 운영하던 건설 부문을 통합해 시너지 창출이 가능해졌고 패션과 식음사업의 해외진출 가속화와 새로운 사업기회를 발굴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번 합병은 회사의 핵심 경쟁력을 조기에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합병 후 매출이 오는 2020년 60조원까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