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13일 오후, 서울 이태원의 크래프트 펍 '메이드인퐁당'에는 서울에서 맥주깨나 마신다는 이른바 '맥덕'('맥주 덕후'의 줄임말로, 맥주 마니아를 가리키는 신조어)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최근 뉴요커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식스포인트 브루어리' 맥주의 한국 론칭 파티가 열렸기 때문이다.


이 브루어리는 역사가 길지 않은 미국 크래프트 브루어리 중에서도 신진 그룹에 속한다. 2004년에 문을 연 이래 뉴욕의 지역 펍들을 대상으로 생맥주만을 공급하다가 2011년에 와서야 처음으로 캔에 담긴 제품을 출시했을 정도다.

주력 제품인 '벵갈리 IPA'의 경우 적당한 쓴맛을 지니고 있어 미국식 IPA를 처음 접하는 사람도 거부감 없이 마실 수 있는 맥주라는 평이다. 하지만 이제 갓 브로드웨이 펍에서 대중적인 지지를 얻기 시작한 맥주가 바로 한국에 이식되는 속도라니…. 



"지난해만 해도 미국의 신규 맥주브랜드를 수입하기 위해 접촉하면 답이 없거나 전화를 받지 않는 경우가 많았어요. 지금은 한국시장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어요. 브루어리 대표가 직접 와서 론칭 행사를 하는 경우도 있죠" '네브래스카', '빅토리' 등의 미국 크래프트 맥주를 수입하는 비티알 커머스 노진호 이사의 말이다.

미국발 크래프트 맥주 혁명의 소용돌이에 전세계가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이미 10년이나 지난 이야기다. 지난해 미국의 전체 맥주시장에서 크래프트 맥주가 차지하는 비중은 20%에 달했고, 총 매출액은 196억달러로 전년에 비해 37% 성장했다. 전체 맥주시장에서 크래프트 맥주의 비중이 이제 겨우 1%를 넘길까 말까 한 우리나라의 현실과는 차이가 크다.


하지만 우리나라 역시 이 소용돌이의 인력권에 확실히 진입한 모양새다. 지난해 미국산 크래프트 맥주의 다섯번째 고객으로 올라선 것이다. 이태원, 홍대 등 크래프트 맥주를 취급하는 펍이 몰린 곳에 가보면 이러한 변화를 확연히 느낄 수 있다.

'밸러스트포인트'의 '스컬핀', '로스트코스트'의 '인디카'등 미국산 크래프트 병맥주가 메뉴판의 상단을 차지한 곳들이 많다. 또한 자체 맥주를 생산하는 곳들도 미국식 레시피를 참조한 제품을 앞다퉈 내놓는다.


불과 몇년 전만 하더라도 유럽 맥주와 일본 맥주에 가려 우리나라의 대공장 맥주와 별반 차이가 없고 개성도 부족하다는 평판을 받던 미국 맥주의 달라진 위상. 이 변화의 배경에는 이태원이라는 공간이 있다. 



"예전에는 이태원이 험한 동네라는 인식이 많았죠. 미군이 워낙 많았으니까. 하지만 차츰 이들이 평택 기지로 이전하면서 이태원이 공동화(空洞化)되기 시작했어요. 그러던 차에 2012년 강남의 전셋값이 폭등했죠. 그래서 강남의 유명 어학원 주변에 살던 외국인, 특히 미국인 강사들이 이태원으로 옮겨오기 시작했어요. 그들 중 다섯명이 자신들이 미국에서 마시던 맥주를 한국에서도 마실 수 있게 하기 위해 공동 출자를 해서 세운 펍이 바로 '맥파이'입니다" '스컬핀'을 수입하는 에이티엘코리아 임준택 이사의 회고다.

'맥파이'이후 '더 부스', '크래프트 웍스' 등 외국인이 운영하는 펍들이 속속 문을 열며 새로운 맥주의 유행을 선도했고 여기에 '사계', '파이루스', '메이드인퐁당' 등 자체 레시피로 무장한 토종 펍들이 가세했다. 이들이 어떤 식으로든 자신들의 맥주 라인업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이 바로 IPA, 즉 인디아 페일 에일이다.

이 맥주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인도와 연관이 있다. 18세기 중반 러시아의 차르가 영국 맥주 수입을 금지하자 수출길이 막힌 영국 브루어들은 인도를 대안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무역을 범선에 의존하던 시기였기에 인도까지 가는 긴 항해 동안 변질되지 않을 맥주가 필요했다.


이에 부합하도록 기존 맥주보다 알콜 도수를 높이고 들어가는 홉(Hop)의 양도 늘려서 만든 맥주가 바로 IPA다. 홉은 맥주의 쓴맛과 향기를 결정하는 요인이기도 하지만 변질을 막는 역할도 했기 때문이다. 이 맥주가 때아닌 미국 크래프트 혁명의 첨병 역할을 하게 된 것도 바로 이 홉과 연관이 있다. 



원래 미국의 맥주 브루어들은 유럽 홉을 수입해서 썼다. 과일향기, 꽃향기 등 강한 개성을 지닌 미국 홉이 맥주 양조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에 불어 닥친 크래프트 맥주 열풍은 외면받던 미국 몰트와 홉을 양조의 전면에 등장시켰다.

온갖 향기가 나는 미국산 홉이야말로 양조자의 개성을 드러내는 더없이 좋은 무기였다. 그리고 홉의 향을 강조한 맥주를 만들기에 IPA보다 더 적합한 레시피는 드물다.

이태원의 '파이루스'에서 자체적으로 개발한 '여름안에서 섬머 I.P.A.'를 판매하고 있는 이인호 대표는 얼마 전 미국 맥주 여행을 다녀왔다. 와인을 공부하는 사람이 프랑스를 다녀오는 것처럼 크래프트 맥주를 알고 싶은 사람이 미국을 방문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세다.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미국 크래프트 맥주의 발전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지금은 일반적인 산뜻함과는 거리가 있는 독특한 맥주들이 미국의 새로운 트렌드가 되고 있어요. 벨기에 식으로 야생효모를 활용하거나 배럴에이징(나무통 숙성)을 도입해 사우어 맥주(신 맛이 강조된 맥주), 구리구리하고 가죽냄새나는 맥주를 만드는 브루어들을 많이 봤어요"

이 대표에게 미국 맥주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에 대해 물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미국 맥주는 미국을 많이 닮았어요.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가 맥주에 많이 묻어나죠. 그래서 '맥주는 이래야 한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마시면 곤란해요. 마음을 열고 다채로운 풍미를 즐길 필요가 있어요. 또 한 가지는 맥주가 약간 쌉싸래해요. 일단 그 맛에 적응이 되면 빠져드는 일만 남은 겁니다"

마음을 열기 위해, 마음을 열고 마시는 술. 이번 주말엔 홉의 향기가 더위에 지친 몸을 깨어나게 하는 미국식 IPA 한잔을 마셔보는 건 어떨까.

용어설명
·크래프트 맥주(Craft Beer) : 대기업이 아닌 개인이나 소규모 양조장이 자체 개발한 제조법에 따라 만든 맥주. ‘수제 맥주’로도 불린다. 과일향이 나고 홉의 쓴맛이 짙게 배어 나오는 등 각기 독특한 풍미를 지녔다. 1970년대 말 미국양조협회(American Brewers Association, ABA)가 개인을 포함한 소규모 양조장이 소량 생산하는 수제 로컬 맥주를 뜻하는 용어로 처음 만든 표현이다.(출처: 한경 경제용어사전)


·브루어리(Brewery) : 맥주를 만드는 양조장. 이곳에서 맥주를 만드는 이를 브루어(Brewer)라고 한다.

·홉(Hop) : 뽕나무과의 덩굴 식물로, 이 식물의 암꽃을 따서 말린 것을 맥주 제조에 사용한다. 맥주에 독특한 향과 쓴맛을 부여하는 한편 맥주가 쉽게 변질되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맥아(Malt)와 함께 맥주를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될 원료다.

·페일 에일(Pale Ale) : 페일 몰트(Pale Malt)를 사용해 만든 영국식 상면발효 맥주. 이를 바탕으로 알코올 도수를 높이고 홉을 더 많이 첨가한 인디아 페일 에일, 즉 IPA가 만들어졌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
www.moneyweek.co.kr) 제391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