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홍난파음악공원에 들어서면 성곽 유구는 자취를 감춘다. 이곳을 지나 빌라촌 길 왼쪽으로 들어서면 꼬불꼬불한 송월 4길이 시작된다. 이곳은 문화재 주변의 건축규제를 지키지 않은 다세대주택들이 버젓이 들어선 곳이다. 성곽은 국가지정문화재며 문화재 경계에서 100m까지는 건축규제 대상지다. 이 범위 안에서 건물을 지으려면 문화재보호구역 지표면에서 3.6m 높이를 기준으로 앙각(물체에 대한 관측자의 시선이 지평면과 만드는 각)은 27도 이내여야 한다. 성곽이 보이지 않는다고 이처럼 건축규제를 무시한 걸까. 빌라 사이 주차장 안쪽 담벼락에서도 성돌이 보인다.
송월 4길을 따라가면 송월 2길과 다시 만난다. 길에 성곽 관련 표시가 없어서 헤맬 수밖에 없다. 양의문교회 앞길을 따라 최근 복원된 성곽이 보이지만 50m쯤 지나 한국사회과학도서관 앞 소방도로에서 또 잘린다. 성 밖의 행촌동과 성안의 사직동을 오갈 소방도로를 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길모퉁이 편의점 앞 소방도로 북쪽부터 성곽은 완전한 모습을 보인다.
◆행촌동의 유래와 권율 도원수 집터
성곽이 끊어진 곳에서 왼쪽 내리막길로 접어들면 행촌동(杏村洞)이다. 이곳에 수령 420년 된 은행나무가 있어서 이를 따 지은 이름이다. 은행나무는 성곽 서쪽 밑으로 자리 잡은 연립주택 뒤에 있는데 길이 막혀 작은 철문을 통해 들어가야 한다. 그 은행나무 밑에는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을 이끈 권율 도원수의 집터임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있다. 장군이 살던 집은 지금은 없어졌다.
옛집에 관한 고사가 떠오른다. 백사(白沙) 이항복 대감은 권율 장군의 사위였고 그들의 집은 이웃했다. 백사의 집에 큰 감나무(살구나무라는 설도 있다)가 있었는데 가을이면 감이 탐스럽게 익었다. 그 감나무 가지 일부가 담장을 넘어 권율장군 집 마당으로 뻗었다. 세도가였던 권율 장군의 하인들이 감을 따먹자 화가 난 이항복은 권율이 기거하는 방문의 창호지를 뚫고 팔을 쑥 내밀어 “이 팔이 뉘 팔이요”하고 물었다. “이놈아, 당연히 네 것이지 누구의 것이냐”하고 권율장군이 답했다. 이항복이 다시 물었다. “저 마당으로 가지가 뻗은 감나무는 누구의 것입니까” 장군은 “그것도 당연히 네 것이 아니냐” 하고 대답했다.
◆딜쿠샤에 얽힌 이야기
표지석 바로 옆 서북쪽으로 오래된 붉은 벽돌집이 있다. 이 집이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 소식을 전세계에 최초로 알린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Albert W. Taylor 1875~1948) 기자가 살았던 ‘딜쿠샤’(Dilkusha)다. 앨버트는 금광개발업자인 아버지 조지 테일러를 따라 1896년 한국에 왔다. 그 또한 금광기술자이자 전기기술자로, 미국 UPA통신원으로 1923년부터 1942년 일제에 의해 추방될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 그러나 이 집은 2006년 그의 아들 브루스 테일러가 찾아올 때까지 누가 지었으며 누가 거주했는지 의혹이 풀리지 않았다.
그는 1919년 일제의 화성 제암리 학살사건과 3·1독립선언서를 입수해 전 세계에 알렸다. 1919년 3월1일 전날은 그의 아들 브루스가 지금의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태어난 날이었다. 앨버트는 누군가 아들의 요람에 놓아둔 독립선언서를 발견했다. 당시 일제경찰이 들이닥쳤지만 간호사들이 독립선언서를 아기의 침대 밑에 숨긴 덕분에 이를 지킬 수 있었다. 앨버트는 독립선언서 사본을 동생 빌의 구두 뒤축에 숨겼고 그를 일본 도쿄로 보냈다. 이후 3·1운동은 그렇게 UPA를 통해 세계에 알려졌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고 미일관계가 악화됐다. 일본은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운 그를 서대문형무소에 가뒀고 그의 아내 메리는 6개월 동안 딜쿠샤에 가택연금했다.
이 집은 화강석 밑둥 위에 붉은 벽돌을 쌓은 프랑스식 건축양식이며 우리나라에서는 희귀한 건물로 꼽힌다. 벽돌은 미국산이다. 집은 오래 수리하지 않아 벽돌의 모서리가 떨어졌고 박공지붕 밑 나뭇조각은 너덜너덜하다. 건물 오른쪽 아래 머릿돌에는 영어로 ‘DILKUSHA 1923’, ‘PSALM CXXVⅡ-Ⅰ’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딜쿠샤는 힌두어로 기쁨과 행복, 또는 이상향이나 희망을 의미하고 1923년은 이 집을 지은 해다. ‘PSALMS CXXVⅡ-Ⅰ’은 로마자로 성서의 시편 127편 1절을 뜻한다.
이처럼 힌두어와 성경구절이 나란히 조합을 이룬 이유는 뭘까. 인도에서 태어난 앨버트는 인도 북부 곰티강 인근의 딜쿠샤 궁전을 보며 결혼 후 자신이 살 집의 이름을 그렇게 짓기로 작정했다. 그의 아내는 영국인으로 배우이며 화가였다. 남편 앨버트는 한국의 독립운동에 관한 기사를 쓰고 부인 메리는 나라 잃은 한국인의 얼굴을 그렸다고 한다. 또 메리는 1917년부터 추방될 때까지 한국에서의 생활을 그린 자서전 ‘호박목걸이’를 썼다. 자서전에서 그녀는 한국의 정치, 문화, 역사, 풍습 등을 마치 호박목걸이를 꿰듯 엮었다는 평을 받았다.
앨버트 테일러 기자는 1948년 미국에서 죽었다. 당시 그가 사랑한 한국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부친 조지 알렉산더 테일러와 함께 묻혀있다.
2006년 브루스 테일러 부부와 딸이 부친의 묘를 참배하러 내한했다. 아버지는 먼 타국 외국인묘지에 묻혔고 어머니는 미국 캘리포니아 맨도사에 묻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두 영혼이 서로를 그리워하는 처지가 된 것이 안타까워서다. 이에 브루스 부부는 어머니 무덤의 흙을 가져와 양화진 아버지 무덤에 뿌리고 양화진 아버지무덤의 흙을 담아다가 맨도사에 묻힌 어머니무덤에 뿌렸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24호(2018년 1월24~30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저작권자 ⓒ ‘존중받는 개인, 부강한 대한민국’ 시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보도자료 및 기사 제보 ( [email protected] )>
-
허창무 한양도성해설가
자본시장과 기업을 취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