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 엘리어트의 시 <황무지>에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쿠마의 무녀(巫女) 이야기가 나온다. 쿠마의 무녀는 아폴론 신으로부터 영생의 은총을 얻었으나 젊음은 보장받지 못해 몸이 점차 쪼그라들었고 결국 항아리에 보존되다 목소리만 남게 된다. 어느날 아이들이 항아리 속의 무녀에게 "무녀야, 무녀야, 뭘 하고 싶니?"라고 묻자 무녀는 "죽고싶어!"라고 외친다. 


매년 만성 질환으로 인한 사망자는 18만명이고 이 중 인공호흡기 및 심폐소생술 등 연명의료로 삶을 연장하던 환자가 최소 3만명 이상이다.


최근 의미 없는 연명의료를 중단하는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이하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됐다. 일명 ‘웰다잉(Well Dying)법’으로 불리는 이 제도는 적극적 치료에도 호전 가능성이 없는 환자의 경우 본인의 희망에 따라 불필요한 연명의료를 중단하고 자연스러운 죽음을 선택할 수 있게 하자는 취지로 제정됐다. 하지만 의료현장에선 절차의 복잡성과 시스템 미비 등으로 혼란이 이어지고 있다. 


◆‘탁상공론’에 그친 공론화 과정

지난달 4일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됐다. 1997년 보호자 판단에 따라 치료를 중단한 환자가 사망한 사고에 대해 보호자와 의료진이 살인방조죄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보라매병원 사건’이 발생한 지 21년 만이다. 또 국내 최초의 존엄사 인정 판결이라 불리는 ‘김 할머니 사건’(2008년)으로부터 10년 만이다.

연명의료결정법의 본격 시행에 앞서 정부는 의료계·윤리계·법조계·종교계·시민단체 등이 참여한 사회적 협의체에서 중지를 모았다. 국회에선 협의체서 나온 의견을 토대로 오랜 논의 끝에 관련법을 제정했다. 해당 법률안은 2016년 2월3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이후 2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연명의료결정법이 도입됐지만 의료현장의 반응은 싸늘하다. 연명의료결정법에 따르면 암·후천성면역결핍증·만성 폐쇄성 호흡기질환·만성간경화를 앓고 있는 말기 환자와 임종기 환자 중 희망하는 이들은 전문기관에 연명의료계획서와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해 제출하면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받지 않을 수 있다.

/사진=이미지투데이
문제는 죽음을 목전에 둔 환자 중 본인의 상태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경우가 10%도 채 안 된다는 것. 환자의 의사능력이 없고 사전에 연명의료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을 때는 환자 가족 전원의 합의와 의사 2인의 의료적 판단이 더해져야 연명의료 중단이 가능하다.

이에 대해 허대석 서울대병원 교수는 “현실적으로 (죽음을 앞둔 환자에게) ‘당신은 죽는다’는 말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며 “가족과 의료진이 상의해 결정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보수적으로 연명의료 대상을 정하게 해놨고 절차도 너무 복잡하다”고 지적했다.

실제 연명의료 대상인 의학적 시술은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착용,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등 4가지로 제한되며 환자의 생명을 단축하는 시술을 시행하거나 물·영양·산소의 단순 공급을 중단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또 연명의료결정법에 따라 연명의료 중단 등을 이행하려는 의료기관은 내부에 의료인 3명과 종교계·법조계·윤리학계·시민단체 등의 비의료인 2명 등 총 5인 이상으로 구성된 윤리위원회를 설치해야 한다. 지난달 21일 기준 윤리위원회를 구성한 의료기관은 종합병원 53개, 병원 5개, 요양병원 11개, 의원 1개뿐이다. 오랜 기간 준비했지만 전체 의료기관 중 5%도 안되는 일부만 윤리위원회를 꾸린 셈이다.


시스템과 관련된 불만의 목소리도 높다. 지난달 중순 서울대병원은 국가생명윤리정책원이 마련한 ‘연명의료 정보처리시스템’이 사실상 쓸 수 없는 수준이라 판단해 온라인 등록을 잠정 중단하기로 했다. 이 시스템은 의료진이 환자의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연명의료계획서, 연명의료 이행 여부 등을 전산 입력하는 시스템으로 지난달 4일 오픈했다.


하지만 전산입력 절차가 까다롭고 입력 뒤 수정하려면 공문을 보내야 해 많은 환자를 진료해야 하는 의사들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환자단체연합회 관계자는 “정부와 의료기관의 준비 부족으로 연명의료결정법이 전반의 불신을 넘어 임종기 환자나 그 가족들에게 불안감을 심어주고 있다”며 “누구를 위해 어떤 목적으로 연명의료결정법을 제정했는지 혼란스러울 정도”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보건복지부는 연명의료결정 및 그 이행 관련 업무를 관리하는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을 지난해 8월에야 선정했다”며 “6개월 만에 전국 의료기관을 대상으로 연명의료 정보처리시스템 관계자를 교육하고 시험 운행을 거친 뒤 사용 매뉴얼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미 혼란을 예상했다”고 덧붙였다.


◆도입하자마자 개정 논의 착수

환자단체는 병원의 준비 부족과 소극적 태도에 대해서도 우려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시행이 예고된 제도지만 필수 조건인 윤리위원회 구성률이 미미하다는 것이다. 또 연명의료 유보 및 중단이 남용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폐지하거나 간소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일부 의료기관에서 나온다. 


환자단체 관계자는 “연명의료결정법에 보장된 무의미한 연명의료 유보나 중단토록 할 수 있는 권리를 병원의 준비 부족으로 임종기 환자가 누릴 수 없다면 이는 환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며 “마련된 제도를 일단 따른 뒤 추후 문제점이 지속적으로 나오면 절차 간소화 등의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종교계 일각에선 생명 경시 풍조를 확산시킬 수 있다는 이유로 연명의료결정법 자체를 반대하는 주장도 나온다.


결국 국회에선 연명의료결정법 시행 한달도 안돼 김상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개정법률안 등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개정 논의에 착수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관계자는 “연명의료 대상이 되는 의학적 시술을 대통령령으로 추가할 수 있도록 하고 말기 환자가 호스피스전문기관을 이용하는 경우 임종 과정에 있는지에 대한 여부를 담당의사 1인의 판단만으로 가능하게 하는 내용의 법안을 상임위에서 논의 중”이라며 “사회적 논란이 많았던 제도인 만큼 앞으로도 개선할 부분이 있으면 지속적으로 수정해 나갈 방침”이라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30호(2018년 3월7~13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