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 한 대형병원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폐렴 환자들이 나왔다. 대부분 임산부였고 이 가운데 4명이 목숨을 잃었다. 영유아의 간질성 폐렴도 잇따랐다. 질병관리본부가 역학조사를 실시하고 몇 달 만에 나온 답은 가습기 살균제였다. 가습기 살균제 참사가 세간에 모습을 드러낸 지 10년이 흘렀다. 정부에 접수된 가습기 살균제 피해로 인한 사망자는 1653명이지만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는 1만40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측했다. 피해자들은 숨을 쉬기 위해 목을 절개해서 산소호흡기를 삽입하거나 폐 이식을 기다려야 했다. 피해 규모와 질병은 계속 확대되고 있다. 유해성 입증부터 기업의 증거인멸 재판과 정부의 피해 인정까지 참사의 마침표를 찍기까진 갈 길이 멀다. 전문가들은 제2의 가습기 살균제 사태를 막으려면 특별법 제정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법과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가습기살균제피해자모임모임 관계자들이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옥시레킷벤키저 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가습기살균제 기업 형사처벌과 책임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뉴스1 1994년 전 세계 최초로 SK케미칼 전신인 유공이 개발한 가습기 살균제가 출시됐다. 유공은 ‘깨끗한 가습기, 건강한 실내공기’란 광고 문구를 내세워 소비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제품은 마트에서 성황리에 팔려나갔다. 첫 출시 기업을 따라 애경과 옥시 등 생활용품 기업들도 가습기 살균제품 시장에 뛰어들었다.
가습기 살균제가 ‘침묵의 살인자’로 불리게 된 것은 17년이 지난 후였다. 대형병원을 중심으로 원인 미상의 영유아 폐렴 발생이 보고됐다. 매년 수십명의 영유아를 포함한 이들이 원인을 알 수 없는 급성 간질성 폐렴(기저 폐질환이 없는 정상인에게서 급속히 진행되는 전격성 폐질환) 등을 앓다 목숨을 잃거나 평생 질병을 떠안으면서 가습기 살균제의 유해성이 2011년 수면 위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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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MIT·MIT와 폐 손상 인과관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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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 살균제 참사 일지.
한국환경산업기술원 가습기 살균제 피해지원 종합포털에 따르면 올 4월16일 기준 가습기 살균제 피해를 신청한 인원은 7419명으로 이 중 1653명이 사망했다. 정부가 피해를 공식 인정한 지원 대상자는 4168명이다. 10년이 흘렀지만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현재 진행형이다.
홍지호 SK케미칼 전 대표는 애경산업과 ‘가습기 메이트’를 제조해 판매하며 흡입 독성 원료 시험과 같은 안전성 검사를 하지 않아 90여명의 사상자를 낸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지만 올해 1월 1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동물실험을 진행한 결과 가습기 살균제 성분인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메틸이소티아졸리논(MIT)과 폐 손상 및 천식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할 증거가 없다는 재판부의 판단에서다. CMIT·MIT는 살균보존제로 제품의 변화나 부패를 막는 방부제 역할을 한다.
CMIT·MIT 성분이 천식과 유사한 증상과 폐섬유화 증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관련 논문과 연구결과를 제출했지만 증거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에 재판부가 잘못된 근거로 판결을 내렸다는 지적이 나온다.
증인으로 참석했던 박동욱 한국방송통신대 보건환경학과 교수는 “CMIT·MIT 제품을 쓴 피해자의 폐 손상 특징이 유해성이 인정된 PHMG 피해자와 유사하단 논문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재판부가 CMIT·MIT 제품의 위험성을 물티슈나 세정제 등 호흡기 접촉 빈도가 적은 외용 소비제품의 위험성 평과 결과에 견주어 안전하다고 보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지적했다.
이어 “어린 아이들에게 가습기 말고는 폐 손상을 초래할 원인이 없는 점도 인과관계를 높인다”며 “형사책임을 물을 정도의 충분한 증거를 요구하는 법원과 이 정도면 인과관계가 입증된다고 보는 과학계가 가치판단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평가했다.
동물실험의 한계에 대한 목소리도 나온다. 양원호 대구가톨릭대 산업보건학과 교수는 “동물실험에서 인과관계가 없어도 사람에겐 상해를 입힐 수 있다”며 “과거 독일이 개발한 입덧방지용 수면제 성분인 탈리도마이드가 동물실험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1만명의 기형아를 탄생시킨 사례가 있다”고 설명했다.
장동엽 가습기살균제참사전국네트워크 간사는 “현재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하다 폐질환을 입은 피해자들이 바로 임상적 증거”라고 분석했다. 검찰은 1심 결과에 불복해 항소했으며 5월18일 항소심 첫 재판이 열릴 예정이다. 항소심에서도 피해자들의 질병과 원료 간 상관관계 등에 대해 법정 공방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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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 살균제로 쓸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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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환경보건시민센터 관계자들이 가습기살균제 참사 책임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뉴스1
기업들이 제품의 유독성을 알면서도 외면했다는 점도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를 판매한 옥시와는 달리 원료를 제조한 SK케미칼은 법적 책임을 피하고 있다. ‘옥시싹싹 가습기당번’의 원료물질 PHMG(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을 공급한 SK케미칼 전 직원 4명은 2019년 7월 재판에 넘겨졌다. 앞서 신현우 옥시 전 대표는 가습기 살균제 제품에 들어간 PHMG의 안전성을 검증하지 않았단 혐의로 징역 6년을 받았다.
PHMG는 살균력이 뛰어나고 물에 잘 녹아 살균제와 물티슈 등에 쓰인다. SK케미칼은 이 원료를 카펫 세척용으로 사용해왔다. 개발 초기 PHMG는 유해화학물질등록법에 따라 ‘유독물’이 아닌 ‘물질’로 국립환경연구원에 등록돼 있었다. 이를 근거로 SK케미칼은 “원료를 옥시에 공급한 사실은 있지만 가습기 살균제를 만드는 데 쓰일 줄은 몰랐다”, “별도의 도매업자를 통해 공급했다”, “인체에 유해한지 몰랐다”고 주장했고 법원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SK케미칼이 안전을 간과했다는 지적은 끊이지 않고 있다. 장동엽 간사는 “액체에 희석하는 형태가 아닌 기체 등 다른 형태로 쓰일 경우에 대해서도 자체적으로 유해성을 검증했어야 했다”며 “화학제품을 제조하는 업체에서 결함이 없는 물건을 만들어 판매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화학업계 한 관계자는 “고객사가 원료의 사용 용도를 바꿀 때 성질 변화나 독성 등을 우려해 원료 공급사에 의견을 구한다”며 ”옥시도 기체 형태로 바뀔 수 있는 제품을 만들기 전 SK 측에 유해성 등에 대해 물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이어 “공급계약을 체결하기 전 제품 물성표를 두고 논의도 활발히 한다”고 했다.
반면 SK케미칼은 옥시와 직접적인 접촉이 없었단 입장이다. SK케미칼 관계자는 “원료는 중간 유통점을 통해 공급한 것이고 유통점이 옥시에 판매한 것”이라며 “그 많은 화학기업들과 원료 제조사들이 일일이 제품 성분을 두고 논의를 하면 어떻게 일이 진행되겠는가”라고 말했다.
SK케미칼이 증거인멸 재판에서도 무죄를 받을지 주목된다. 현재 SK케미칼 전·현직 임원 3명이 가습기 살균제 자료를 조직적으로 없애거나 숨긴 혐의로 2년째 재판을 받고 있다. 이영순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는 1994년 SK 측 요구로 ‘가습기 메이트’ 독성실험을 진행했고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 결과를 따르면 제품을 출시해선 안됐다. 하지만 SK케미칼은 이 보고서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