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자동차 매연 냄새에 끌렸다던 장성택 BMW코리아 드라이빙센터장은 현재 대한민국 최고의 자동차 정비 명장이 됐다. /사진=장 센터장 제공
“후배들이 저의 성공보다는 뼈아픈 실수와 실패를 배웠으면 좋겠어요.”
평생을 자동차만 바라보며 살아온 장성택 BMW코리아 드라이빙센터장의 조언이다. 자신의 삶을 돌아본 장 센터장은 성공의 기쁨보다는 실수와 실패의 쓴 잔이 더 기억에 남는다며 후배들이 이를 되새겨 주길 바랐다. 실수를 통한 배움과 실패를 통한 교훈 없이는 성공에 이를 수 없다는 깨달음 때문이다. 남들은 은퇴를 고민하는 나이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매캐한 자동차 매연 냄새가 좋았다며 여전히 자동차가 좋다고 웃는 장 센터장의 열정은 여전히 뜨겁다.

향긋(?)했던 매연의 추억



그는 축구장 38개 면적 크기의 인천 영종도 BMW코리아 드라이빙센터에서 센터장을 맡고 있다. 각종 자동차 전시공간과 다양한 자동차 주행트랙을 보유하고 있는 BMW코리아 드라이빙센터는 BMW그룹 내에서도 세계에 3곳밖에 없을 만큼 희소성이 높은 장소다. 국내 자동차 회사 가운데 이 같은 공간을 갖춘 곳은 BMW가 유일하다.


지난 2014년 문을 연 이래 약 120만명의 누적 방문객수를 기록했다. 자동차 체험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는 BMW코리아 드라이빙센터를 진두지휘하는 장 센터장은 ‘자동차’라는 말만 들어도 설레고 벅차한다.

그는 “어린 시절 동네에 나무를 운반하는 트럭이 오면 왠지 모르게 큰 바퀴가 좋아서 흙도 닦아주거나 뿜어 나오는 매연 냄새가 너무 좋았던 기억이 난다”며 “하루종일 트럭 꽁무니를 따라다니면서 어른이 되면 큰 자동차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고 회상했다.


매연 냄새가 좋았다니 남이 들으면 기겁할 일이지만 그만큼 그의 자동차 사랑은 유별나다. 경북 경주에서 가난한 집안의 3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난 장 센터장은 자동차 사랑을 가슴에 품고 포항수산고등학교(現 포항해양과학고등학교) 선박기관과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재학시절 특별활동 시간을 통해 자동차를 직접 접할 수 있는 계기를 얻었다.

졸업 뒤 국립중앙직업훈련원(現 한국폴리텍2대학)의 내연기관과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전문적인 차 기술을 습득했다.

천대받던 과거, 그래도 ‘자동차’는 내 전부




지난 1980년 국립중앙직업훈련원 내연기관과에 입학한 그는 본격적으로 자동차를 탐구하는 데 매진했다. 당시는 현대자동차의 포니가 국내에 보급되던 시절이었지만 전체적인 국내 자동차 기술은 형편 없었다.

장 센터장은 “자동차 제조 기술이 세계수준에 크게 뒤쳐진 상황에서 일본 브랜드에 많이 의존했다”며 “제가 더 자동차 공부에 매진하는 계기가 됐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당시 국내 자동차 제조 기술과 현재를 비교하면 가히 ‘하늘과 땅’ 차이라고 단언한다. 기술적인 부분, 기계적인 부분, 인력의 교육수준, 다양한 측정공구와 정비 공구는 물론 컴퓨터의 보편화와 정보기술(IT)의 접목으로 자동차와 관련된 모든 영역에서 상상 그 이상의 도약을 이뤘기 때문이다.

장 센터장은 스스로 한국이 자동차 강국으로 발전하는 데 당당히 일조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그 과정은 매우 고달팠다. 당시에는 자신과 같은 직업을 가진 이들에게 흔히들 ‘기름밥 먹는 정비공’이라며 천대를 해서다.
장성택 BMW코리아 드라이빙센터장은 후배들이 자신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기를 바란다. /사진=장 센터장 제공
그는 “천대받던 당시와 비교하면 현재는 당당한 기술인으로 인정받고 있다”며 “자동차정비 기술과 관련된 4년제 대학의 교과 과정도 마련돼 있고 한국도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자동차 강국의 면모를 갖췄다”고 자랑스러워했다.

“성공보다 실패의 교훈을 가르치고 싶다”



장 센터장은 어린 시절에는 지독한 가난과 싸웠고 청년 시절에는 세상의 천대에 맞섰다. 그렇지만 아무도 원망하지 않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시간을 이겨냈다. 농촌 기능 봉사를 하면서 치아를 크게 다쳤음에도 치료비가 없어서 오랫동안 그대로 지냈다. 또 책 살 돈이 없어서 동료의 책을 빌려 직접 글씨와 그림을 옮겨 적으며 공부했다.

더 빠르게 선진 자동차 기술을 습득하고 싶어 남들이 보면 무식하다 할 정도로 공부에 매달렸다. 난관도 있었다. 기술서적은 영어로 돼 있어 그의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그는 무너지지 않고 부딪혔다. 장 센터장은 “기름쟁이라는 말은 듣기 싫었다.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외국인들을 만나면 무조건 말을 걸었다”며 “부끄러웠지만 꾸준하게 실천하면서 한번 들은 말을 수없이 반복하고 다음에 꼭 써먹었다”고 회상했다.

국내 수입자동차업계 최초의 ‘대한민국 명장’ 타이틀은 이런 인내와 노력이 빚어낸 산물이다. 그는 “간절함보다는 절박함을 통해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면서 자신을 혹독하게 다듬어 나갔다”며 “결심이 흔들릴 때마다 스스로를 절박함 속으로 몰아넣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자동차와 함께한 세월도 어느덧 40년. 한국 최고의 자동차 명장이라는 자부심도 후배들 앞에서는 더 알려주지 못해 늘 미안한 마음이다. 그동안을 돌이켜보면 많은 것을 이뤘지만 가슴 한구석이 허전한 것은 아마도 혼자만 달려왔을 뿐 후학 양성을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하지 않았던 자신이 부끄럽다는 것.

장 센터장은 “후배들이 그동안 내가 잘하고 성공했던 것보다 실수하고 실패했던 모든 부분을 배웠으면 한다”면서 “후배들이 더 성장할 수 있도록 나의 뼈아픈 경험을 아낌없이 주고 싶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