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주주 할증과세 적용 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위 수준에 달하는 상속·증여세 부담을 덜기 위해 한국의 상장사들은 기업가치를 억눌러 주가를 낮추는 타나토시스에 나선다. 사진은 이소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7월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426회 국회(임시회) 제5차 본회의에서 2회 추가경정예산안에 대한 찬성 토론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1. 북미 지역에 서식하는 '버니지아 주머니쥐'는 포식자를 만났을 때 몸을 뒤집고 혀를 내밀며 죽은 척 한다. 지독한 냄새까지 내뿜으며 포식자로 하여금 '썩은 고기'라고 믿게 만든다. 생물학계에선 이런 생존 전략을 '타나토시스'(thanatosis) 또는 '의사행동'(擬死)이라고 부른다.


#2. 대한민국 주식시장에도 의도적으로 자신을 불량기업처럼 보이게 만들어 주가를 떨어뜨리는 기업들이 있다. 오너 3세로의 승계를 앞둔 중견 상장기업 A사는 2020~2021년 자사가 소유한 알짜 골프장을 후계자가 지배하는 비상장사 B사의 부실 골프장과 합병시키려 했다. 합병이 이뤄지면 부실을 떠안게 돼 기업 가치가 훼손될 것이란 우려에 A사 주가는 급락했다. 소액주주들의 거센 반발로 결국 합병은 무산됐지만, 지금도 A사의 주가순자산비율(PBR)은 0.5배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한국의 증시는 주요국과 비교할 때 저평가돼 있다. 그래픽은 주요국 증시 PBR 비교 데이터. /그래픽=강지호 기자


상속세 부담이 낳은 한국 기업의 '타나토시스'

9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6일 종가 기준 코스피 상장사 806개 중 PBR이 1배 미만인 종목은 533개로, 전체의 66%에 달했다(우선주 제외 기준). PBR이 1배를 밑돈다는 것은 기업의 모든 자산을 처분했을 때 받을 수 있는 청산가치보다 시가총액이 낮게 형성돼 있다는 의미다. 기업의 미래 성장성은커녕 현재 보유한 자산 가치조차 주가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단 얘기다.

정치권에선 '코리아 프리미엄'을 부르짖고 있지만, 현실은 여전히 '코리아 디스카운트'다. 지난 6일 기준 코스피 상장사들의 평균 PBR은 1.64배에 그쳤다. 이는 한국과 경제 구조가 유사한 일본의 닛케이225 지수(2.57배)나 반도체 라이벌인 대만 가권 지수(2.41배)에 크게 못 미친다. 미국 S&P500 지수(5.35배)나 나스닥 지수(8.16배)와 비교하면 그 격차는 3~5배로 벌어진다.


상속·증여세 절감 등을 위해 상당수 기업들이 배당을 축소하고 수익성을 악화시키는 등 주가를 인위적으로 억누르는 것이 한국 증시 저평가의 여러 원인 가운데 하나로 지목된다. 우리나라에서 상장사의 경우 상속·증여 시점 전후 각 2개월(총 4개월) 평균 주가를 과세표준 산정의 기준으로 삼는다. 미국, 영국, 독일 등 다른 선진국들도 상장사에 대해선 마찬가지로 시가를 기준으로 상속세를 부과하지만, 공제액이 커서 한국보다 상속세 부담이 적다.

신민섭 DS투자증권 연구원은 "근본적인 문제는 상장사 최대주주에게 부과되는 높은 상속·증여세율에 있다"며 "주가가 상속·증여세액 산정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만큼 세 부담을 줄이려면 주가를 낮게 유지하는 편이 유리하다는 유인이 작동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따라 지난해 5월 이소영 의원(더불어민주당·경기 의왕시과천시)은 이른바 '주가 누르기 방지법'으로 불리는 상속세 및 증여세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상장사도 PBR이 0.8 미만일 경우 비상장사처럼 순자산가치의 80%를 기준으로 상속·증여세를 물리도록 하는 것이 골자다.

'당근책'도 담았다. 상장주식의 시세가 정상적으로 형성된 경우에는 최대주주 할증과세(20%)를 면제해 주가가 상승하더라도 세 부담이 과도하게 늘지 않도록 했다. 또 상속·증여세를 현금으로 납부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상장주식 물납을 허용토록 했다. 이 의원은 "명목상 20% 할증보다 시장 현실을 반영한 세제 개편이 필요하다"며 "상장주식 물납 허용을 통해 현금 납부 부담을 덜어줄 필요도 있다"고 밝혔다.


이 법안은 국회 재정경제기획위원회 소위원회 논의 이후 현재 계류돼 있다. 최근 이 대통령이 민주당 코스피5000특별위원회 소속 의원들과의 오찬에서 자본시장 활성화 방안을 논의하며 주가 누르기 방지법에 공감을 표한 것으로 전해지면서 법안 추진에 속도가 붙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일본 증시를 깨운 'PBR 1배'의 마법

일본거래소그룹(JPX) 2023년 3월, PBR 1배 미만 기업을 대상으로 '자본비용과 주가를 의식한 경영' 실천 방안을 마련해 공시할 것을 요청하자 일본 기업들은 비효율 자산과 사업을 정리하며 주가 제고에 나섰다. 그래픽은 도요타의 주식 종가, PBR 움직임 추이. /그래픽=강지호 기자


개정안이 국회 문턱을 넘어선다면 상장사 최대주주들도 최소한 PBR 0.8을 기준으로 상속·증여세를 물어야 한다. PBR은 시가총액을 순자산으로 나눈 값이다. 시가총액은 기업이 한 해 거둔 순이익에 기업의 미래 가치에 대한 기대감을 보여주는 주가수익비율(PER)을 곱한 값과 같다.

결국 'PBR=(순이익 ÷ 순자산) × PER'란 식이 산출된다. 여기서 '순이익 ÷ 순자산'이 자기자본이익률(ROE)이다. ROE는 주주가 맡긴 자본(순자산)을 활용해 1년 동안 몇 %의 수익을 냈는지 보여주는 핵심 경영 지표다.

법이 시행되면 PBR 0.8 미만 기업의 최대주주 입장에선 어차피 PBR 0.8 이상을 기준으로 상속·증여세를 내야 하니 굳이 세금 절감을 위해 ROE를 낮출 이유가 사라진다. 회사가 더 많은 순이익을 내도록 노력할 유인이 생긴다는 뜻이다. 또 PER을 낮추기 위해 배당을 줄일 필요성도 사라진다. 결국 ROE와 PER 모두 높아지게 되고 이는 결국 시가총액 증가, 즉 주가 상승으로 이어지게 된다.

국내 대표 가치투자사인 VIP자산운용의 김민국 대표는 "어차피 주가가 PBR 0.8배로 평가받는다면 대주주 입장에서도 주가를 억지로 누르기보다 주주 환원을 통해 기업 가치를 높이는 쪽이 훨씬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고 짚었다. 이어 그는 "과잉 현금을 쌓아두기보다 주주 환원에 투자하는 환경이 조성되면 이는 자연스럽게 ROE 개선과 증시 정상화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한국 증시의 고질적 병폐로 지목되는 '주가 양극화' 해결에 대한 기대감도 드러냈다. 김 대표는 "요즘 시장을 보면 양극화가 너무 심하다. 어떤 기업은 PBR 5배, 10배까지 가는 반면 0.1배, 0.2배에 머무는 종목도 적지 않다"며 "주가 누르기 방지법은 주가를 인위적으로 띄우자는 법이 아니라 주가를 일부러 누르는 왜곡된 유인을 제거하자는 정상화 장치로 조세 정의, 주주 권익 보호, 그리고 주가 양극화 해소라는 측면에서 의미 있는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일본은 'PBR 1배 미만 해소' 정책을 앞세워 침체됐던 증시에 반등의 불씨를 지폈다. 일본거래소그룹(JPX) 2023년 3월, PBR 1배 미만 기업을 대상으로 '자본비용과 주가를 의식한 경영' 실천 방안을 마련해 공시할 것을 요청했다. 만년 저평가라는 일본 증시의 고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거래소가 직접 "기업 가치 제고 방안을 내놓으라"고 주문한 것이다. 미래에셋증권에 따르면 당시 일본(TOPIX 500)에서 PBR 1배 미만 기업 비중은 43%로 미국(S&P 500·3%)이나 유럽(STOXX 600·18%)을 크게 웃돌았다.

거래소의 압박이 현실화하자 일본 기업들은 비효율 자산과 사업을 정리하며 주가 제고에 나섰다. 이렇게 확보한 현금은 연구개발(R&D)·디지털 전환(DX) 투자에 투입하거나 자사주 매입, 배당 확대 등 주주환원으로 돌렸다. 대표적인 사례가 도요타다. 도요타는 계열사 지분 매각 등을 통해 대규모 현금을 확보했고 이를 설비 투자와 자사주 매입 재원으로 활용했다. 그 결과 도요타는 주가가 급등, 2023년 초 0.92에 머물던 PBR은 1년 만에 1.26로 뛰며 일본 증시 부활의 상징이 됐다.

일괄적 잣대의 함정

업종별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일괄적인 PBR 기준 적용은 자칫 시장의 왜곡을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사진은 강추위가 이어지는 지난 1월12일 오전 인천 서구 서인천복합화력발전소 굴뚝에서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다만 업종별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일괄적인 PBR 기준 적용은 자칫 시장의 왜곡을 불러올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PBR은 공장 부지나 생산 설비 등 대규모 고정 자산을 보유해야 하는 장치 산업의 경우 개선이 쉽지 않다. 특히 산업이 성숙기에 접어든 경우 시장의 기대치, 즉 PER을 높이기 어려워서다.

세계 자동차 시장을 이끄는 폭스바겐의 PBR도 0.3배 안팎에 머물고 일본 최대 철강사인 신일본제철도 0.6배 수준에 그친다. 유럽 금융의 심장으로 꼽히는 도이치방크(0.4배)처럼 금융사들도 업종 특성상 PBR이 0.8배를 넘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저PBR이 전부 대주주가 주가를 눌러서 생긴 결과라고 단정할 수 없다. 주가를 누르지 않아도 산업 전망이나 수급 요인 때문에 재평가가 어려운, 이른바 굴뚝산업 같은 영역도 존재한다"며 "저평가를 전부 '의도적 주가 누르기'로 해석해서 일괄적으로 0.8 하한을 적용하면 의도적으로 누른 기업과 시장 구조상 저평가된 기업을 구분하지 못한 채 후자까지 피해를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