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리포트]② 자사주 사면 태우는 美, 대신 포이즌필·차등의결권 있다
[달라진 상법 매뉴얼]
이무영 제도혁신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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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 룰이 바뀌었다. 국회가 8개월 사이 상법을 3차례나 고치면서다.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에 주주가 포함되고, 집중투표제도 도입됐다. 자사주 소각까지 의무화됐다. 개정 상법에 대해 기업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정리한다.
주식시장에서 자기주식(자사주) 소각은 배당과 함께 가장 보편적인 주주환원 방식이다. 주식 수가 줄어 주당순이익(EPS)이 높아지고 주가가 오른다.
미국은 자사주를 소각할 유인이 자연스럽게 자리잡았고, 일본은 거래소의 압박이 관행을 바꿨다.
한국은 달랐다. 자사주를 소각하지 않고 보유하는 것을 오랫동안 허용해온 결과, 자사주가 주주환원이 아닌 경영권 방어의 도구로 굳어졌다. 그러나 2026년 2월 국회가 자사주 소각을 법으로 의무화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미국, 소각이 자연스러운 선택
미국은 회계기준상 자사주를 자산이 아닌 자본의 차감 항목으로 처리하도록 돼 있다. 자사주는 시가총액 계산에서도 빠진다. 자사주 매입이 곧 소각이라는 의미가 내포된 것이다.미국에서 자사주 소각은 절차적 문턱이 낮다. 주(州)마다 회사법이 다르지만 대부분 이사회 결의만으로 즉시 소각이 가능하다. 미국 상장기업 과반이 준거법으로 택하는 델라웨어주가 대표적이다.
CEO 보수도 스톡옵션 등 주가에 철저히 연동돼 있어 경영진 스스로 자사주 소각에 적극적이다. 또 블랙록·뱅가드 같은 거대 기관투자자들은 주주환원에 소극적인 기업의 이사 재선임에 가차 없이 반대표를 던진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포이즌 필과 차등의결권이라는 강력한 경영권 방어 수단이 이미 합법화돼 있어 자사주를 활용할 필요성이 낮다.
포이즌 필은 적대적 인수 시도 시 기존 주주들에게 시장가보다 싼 가격에 신주를 살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 상대방의 지분율을 희석시키는 방어 장치다. 1980년대 기업사냥꾼의 공세에 맞서 델라웨어주를 중심으로 합법화됐다. 차등의결권은 구글·메타처럼 창업자에게 1주당 10~20배의 의결권을 부여해 외부 자본이 늘어나도 지배력을 유지하게 하는 구조로, 역시 같은 시기 확산됐다. 이 두 수단이 자리를 잡으면서 굳이 자사주를 경영권 보루로 쥐고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이 구조가 낳은 결과는 숫자로 확인된다. S&P에 따르면 S&P 500 기업들의 자사주 매입 규모는 2025년 3분기 기준 분기당 2490억달러(약 356조원)에 달한다. 최근 12개월 누적액은 사상 처음으로 1조달러를 돌파했다.
일본, 아베노믹스가 이끈 변화
일본의 전통적 기업 철학은 주주보다 종업원·거래처·계열사 등 이해관계자 전체를 중시하는 방향이었다. 상호출자(A사와 B사가 서로 상대방 주식을 보유하는 구조)와 교차보유(계열사들이 그물망처럼 서로의 주식을 나눠 갖는 구조)는 그 철학의 제도적 표현이었고, 자사주는 경영권 방어와 우호 세력 결집의 도구였다.이 점에서 2000년대 초반의 일본은 지금의 한국과 닮아 있었다. PBR(주가순자산비율) 1배 미만 기업이 전체 상장사의 절반을 넘어섰다. PBR 1배 미만이란 회사를 지금 당장 청산해도 주식을 사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시장이 기업의 미래보다 청산 가치를 높게 본다는 의미로, 자본 효율의 총체적 실패를 보여주는 수치다.
변화는 정부가 추동했다. 아베 내각은 2013년 스튜어드십 코드와 지배구조 코드를 잇달아 도입하며 기관투자자에게 주주권 행사 의무를 부과했고, 기시다 내각이 이를 이어받아 개혁을 가속화했다. 그 흐름의 끝에서 2023년 3월 도쿄증권거래소(TSE)가 직접 나섰다.
TSE는 '잃어버린 30년' 동안 좀처럼 오르지 않는 일본 증시를 되살리기 위해 모든 프라임·스탠더드 상장사에 공개 서한을 보냈다. "PBR 1배 미만 기업은 자본 효율 개선 계획을 공시하라. 그러지 않으면 개선 기업 명단에서 제외하겠다." 철학을 바꾸라는 요구가 아니라, 글로벌 자본에서 퇴출될 수 있다는 실존적 압박이었다.
도요타·혼다·소니가 잇달아 대규모 자사주 소각을 선언했다. 2024 회계연도 자사주 매입 규모는 18조엔에 육박하며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기업들은 신규 매입분과 함께 금고에 쌓아두었던 기존 보유분, 교차보유 해소 과정에서 회수된 물량까지 한꺼번에 털어냈다. 자사주를 사고도 그냥 쥐고 있던 관행이, 묵혀두었던 적체분까지 정리하는 문화로 바뀐 것이다.
한국, 외환위기가 만든 관행
1994년 이전까지 한국 상법은 자사주 취득을 원칙적으로 금지했다. 주주 평등과 시장 공정성을 지킨다는 명분에서다. 회사가 자사주를 매입하면 자본이 실질적으로 유출돼 채권자 보호 원칙에 반하고, 시장에서 인위적으로 주가를 끌어올릴 수 있으며, 무엇보다 자사주를 우호 세력에게 매각해 지배구조를 왜곡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원칙이 허물어진 것은 위기 때문이었다. 1994년 증권거래법 개정으로 상장사에 한해 발행주식의 5% 범위 내에서 처음 허용됐고,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며 외국 자본의 적대적 인수를 막는다는 명분 아래 한도가 빠르게 확대됐다. 1998년에는 취득 한도가 사실상 폐지됐고, 2011년 상법 개정으로 자사주 보유와 처분이 완전히 자유화됐다.
자본시장연구원은 2023년 이를 '자사주 마법(Treasury Stock Magic)'으로 명명했다. 회사를 존속회사와 신설회사로 쪼개는 인적분할 과정에서, 상법상 의결권이 없던 자사주 만큼 신설회사 주식이 주어지며 의결권이 부활했다. 대주주는 추가 자금 없이 그룹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고, 일반 주주들의 발언권은 그만큼 줄어드는 구조였다.
자사주 마법보다 더 광범위하고 일상적인 사례는 백기사 매각이었다. 기업들은 평시에는 자사주를 보유하고 있다가, 경영권 분쟁이 벌어지는 순간 우호 세력에게 매각해 의결권을 되살렸다. 소각할 이유가 없었고, 보유할 이유는 충분했다. 서울대 김우진 교수 연구팀이 2017년 한국증권학회지에 발표한 실증 연구에 따르면, 2004~2015년 유가증권시장 상장 제조기업들이 취득한 자사주 중 실제 소각으로 이어진 경우는 연간 기준 평균 2.3%에 불과했다.
정부도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2024년 12월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으로 인적분할 시 자사주에 신주를 배정하는 것이 금지됐다.
남은 과제는 '경영권 방어 공백'
자사주 소각 의무화법에 대해 KDI(한국개발연구원)와 자본시장연구원은 불투명한 지배구조와 미흡한 주주환원 등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핵심 원인을 해결하는 조치로 평가했다.반면 재계와 일부 법학계는 다른 경영권 방어 수단 없는 자사주 소각 의무화가 경영 안정성을 해친다고 주장한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상법 개정안 처리 직전 "경영권 방어 수단을 함께 논의해야 한다"며 반발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포이즌 필·차등의결권 등 대안적인 경영권 방어 수단을 먼저 갖춘 뒤 자사주 소각 의무화로 나아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주요국 가운데 자사주 소각을 법으로 의무화한 사례는 없다. 법무부도 입법 과정에서 국회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자사주는 현행 회사법 체계상 사실상 유일한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활용돼 왔다"며 "공백을 보완할 대체 수단 논의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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