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압직류송전(HVDC) 케이블. / 사진=LS전선


인공지능(AI) 시대 개막으로 글로벌 패권 전쟁이 본격화하면서 전력 확보 능력이 산업 경쟁력을 좌우할 핵심 요소 떠올랐다. AI 연산을 위한 고성능 서버와 이를 뒷받침하는 데이터센터, 이를 구현하기 위한 첨단 반도체 생산에는 막대한 전력이 소요되는 만큼 이를 감당하기 위한 국가 차원의 인프라 구축이 중요한 승부처가 될 전망이다. 정부는 에너지 생산지와 다소비 지역을 잇는 '에너지 고속도로'와 궁극적으로는 '지산지소'(지역에서 생산해 지역에서 소비) 구현을 통해 AI 시대 주도권을 잡겠다는 방침이다.

전력수요 폭증 예상…에너지 전략적 수송 중요

AI 산업의 폭발적 성장은 에너지 다소비로 연결된다. AI 모델이 학습을 넘어 추론의 영역으로 진화하는 상황에서 전력 소모는 더욱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전 세계 데이터센터의 연간 전력 소비는 2022년 415테라와트시(TWh)에서 2030년까지 945TWh로 두 배 이상 증가할 전망이다. 2023년 한국 전체 전력 사용량(557TWh)의 1.7배 수준이다.


국가 첨단산업단지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도 재생에너지 기반 전력망 확충은 필수 과제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첨단 산업의 전력의존도는 타 산업 대비 최대 8배 높아 이를 지원할 전력 인프라 없이는 투자 확보가 어려운 실정이다. 대표적으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단일 산업단지임에도 약 15GW에 달하는 전력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수도권 전체 전력 수요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규모다.

국내 전력 생산의 상당 부분은 비수도권에 위치해 있는 반면 소비는 수도권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로 지적된다. 현재 서울의 전력 자립도는 6.8%에 불과하며 경기지역도 59.1%에 그쳐 전국 평균(108.3%)에 미치지 못한다. 수도권에 기업이 밀집돼 전력 사용량은 많은 반면 생산지는 지방에 있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제시한 방법은 '에너지 고속도로'다. 전국의 에너지자원을 신속하게 통합해 각 지역의 재생에너지 생산과 소비를 하나의 효율적 네트워크로 연결, 적기에 에너지를 안정적으로 전달하는 체제를 구축하겠다는 전략이다. 송전망만 확충하는 것이 아니라 전력의 대동맥을 구축하는 데 있다. 재생에너지 발전이 활발한 서해안과 남부 지역에서 생산된 전력을 수도권 산업단지로 안정적으로 공급함으로써 전력 불균형을 해소하겠다는 것이다.

프로젝트의 실행 주체는 한국전력공사다. 한국전력은 국내 전력망의 설계부터 건설, 운영을 책임지는 유일한 국가 기간망 사업자로 에너지 고속도로 구축의 중심 역할을 맡고 있다.


첫 단추는 '서해안 에너지 고속도로' 건설이다. 한전은 최근 '서해안 초고압직류송전(HVDC) 에너지고속도로' 본작업에 착수했다. 서해안 일대에서 생산되는 대규모 해상풍력 등 재생에너지를 수도권 등 주요 수요처로 수송하는 4개의 HVDC 송전망을 2038년까지 단계적으로 구축하는 프로젝트이다. 첫 번째 구간은 당초 계획보다 1년 앞당긴 2030년까지 완공할 계획이다. 통상 HVDC 송전망 건설에는 9년 이상의 기간이 소요되지만 한전은 공정 혁신을 가속화하고 정부·지자체·제조사와 긴밀히 협력해 1단계 사업을 2030년까지 완수할 계획이다.

과거 송전망 건설은 지역 주민의 반대와 복잡한 행정 절차로 수년씩 지연되는 일이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됐다. 이에 정부는 지난해 9월 '전력망 확충 특별법'을 통해 제도적 장벽을 낮췄다. 국무총리 주재의 '전력망위원회'를 설치해 범정부 차원에서 사업을 관리하고 인허가 절차를 대폭 간소화했다. 환경재해영향평가 등을 신속하게 진행해 건설 기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하겠다는 의지다.


정부의 에너지 고속도로 구상. / 사진=더불어민주당 민주연구원


지역에서 생산해 지역에서 소비하는 체제 필요

에너지 고속도로가 완전한 해법이 될 수는 없다. 전력은 비수도권에서 생산되지만 소비는 수도권에 집중되는 구조는 여전하기 때문이다. 첨단 산업 클러스터가 수도권에 들어설 경우 송전망에 대한 부담이 커지고 전력 손실 및 비용 증가 문제가 수반된다. 주민 수용성 문제를 야기하는 송전망 건설을 지방에만 배치하는 지역 차별 역시 중요한 논쟁거리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궁극적으로 첨단 산업 클러스터의 지방이 이전이 필요하단 지적도 나온다. 박경덕 포항공대 반도체공학과 교수는 "산업 클러스터의 수도권 집중은 전문인력 수용과 견고한 공급망 확보, 인근 소부장 업체들과의 협업 등의 부문에서 장점이 있지만 자연재해와 지정학적 긴장, 에너지 공급 제약이 큰 리스크로 작용할 수 있다"며 "새만금과 영남권을 보완 거점으로 육성하면 원전과 재생에너지를 통해 전력 공급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영산강, 섬진강 등을 활용한 용수 공급 문제 해결도 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재명 대통령 역시 지난 2월 전북 타운홀 미팅 주민제안에서 "생산된 전기를 외지로 쭉쭉 뽑아내는 방식은 가장 원시적인 방법"이라며 "해당 지역에 대규모 전력 수요 시설을 만드는 것이 정답"이라고 했다. 에너지 생산거점으로 기업을 유치해 '지산지소'를 이루는 게 중요하다는 의미다.

지산지소를 이루려면 지역별 차등요금제 등의 유인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하승수 공익법률센터 농본 대표는 "클러스터를 지방으로 분산시키려고 할때 기업 입장에서는 인센티브가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지역별 차등요금제'"라며 "정부는 전기요금을 지역별로 달리 적용할 경우 거리에 따라 10% 안팎의 요금이 차이가 날 것으로 추산했는데 10%가 아니라 50%, 100%까지 더욱 획기적인 차등 요금제를 도입하는 게 필요하다"고 짚었다.

정부는 이른 시일내에 지역별 차등요금제 도입을 추진할 계획이다.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은 최근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에서 열린 부산상공회의소 초청 지역 상공인 간담회에서 "송전요금과 전기 자립도, 지역균형발전 관점에서 지역 전기요금을 싸게 적용하는 세부 방안을 설계하고 있다"며 "조만간 시행될 예정"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