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서울 장충동 이재현 CJ 회장 자택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는 대한통운 택배노조원들./사진=뉴시스


회장 집 앞 시위는 한국 영화와 드라마의 상투적 장면(클리셰)이다. "갑시다"라는 엑스트라 배우의 대사, 붉은 머리띠, 커다란 글씨의 피켓이 의례적으로 등장한다. 대체로 불행한 폭력 사태로 귀결되는데, 종종 '재벌집 막내아들' 진도준이나 '눈물의 여왕' 홍해인처럼 선량한 회장 가족의 온정적 도움으로 아름다운 결말을 맺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은 드라마처럼 단순하지 않다. 그렇게 쉽게 끝날 일이었으면 진작 해결됐을 것이다.


삼성전자 노조가 이재용 회장 집 앞 집회를 예고했다. 자신들이 요구하는 수준으로 성과급을 맞춰주지 않으면 서울 한남동에서 골목 기자회견을 열겠다고 한다. "이 회장이 결심하라"는 압박이다. 한국의 양대 노동조합과 노동운동 단체는 지난 30여 년 동안 '제왕적 리더십' 해체를 요구해왔다. "기업 오너 한 마디에 모든 게 좌우되는 전근대적 경영에서 벗어나자"고 했다. 투명한 시스템 경영, 민주적 경영의 필요성을 주창해왔다. 노조뿐 아니라 사회 전반이 그 방향을 지지했고, 실질적 진전이 있었다. 오너가 아닌 이사회의 경영, 주주 이해 우선 제도가 하나둘 만들어졌다.

'황제 회장' 폐지를 주장해온 노조가 '오너가 결단하라'고 압박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제왕적 대통령의 문제를 말하면서 대통령이 총리와 장관, 나아가 실무자가 할 일에까지 직접 나서길 바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대통령이 그래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주주가 회사의 공식 기구를 뛰어넘는 결정을 하는 것도 옳지 않다. 구시대적 운영이다.

우리 사회는 '회장 집 앞 시위'에 관대하다. 법에 정해진 기준을 벗어나도 공권력이 제지하는 경우는 드물다. 지난 한 세대 간 집회·시위 보장이 우선적 가치로 여겨졌다. 절박한 호소를 위한 최후 수단이라는 사회적 공감대가 바탕이 됐다. 비참하게 해고됐는데 법적 절차로 구제되지 못했을 때, 그 누구도 억울한 사정을 귀담아 들어주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회장 집 앞으로 갔다. 다소 물의가 빚어져도 사회가 용인했다. 언론도 대체로 대문 밖 사람 편에 섰다.

삼성전자의 성과급 갈등은 이런 일과 궤를 함께 하지 않는다. 긴급하고 억울한 사정의 사안이라고 보기가 어렵다. 임금 체불, 무단 해고와 같은 생존권의 문제가 아니다. 이재용 회장이 두문불출로 직원들을 피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정상적으로 출퇴근 하고 있다. 노조의 항의가 불가피하면 사업장에서 하면 된다. 이런 일로 집 앞 시위를 벌이면 정작 필요한 사람들이 할 때마저 행패로 간주되며 외면당한다. 정말 최후의 수단만 남은 이들을 더욱 궁지로 모는 '절박함 가로채기'라고 볼 수 있다.

최근 법원은 기업 경영진 자택 앞 시위를 제한해왔다. 집회 금지 가처분 신청에서 인용 판결이 잇따랐다. 판사들이 '그곳에서 그렇게 할 필요'에 동의하지 않는다. 법률 용어로 '상당성 부족'이다. 노조의 '망신 주기'에 불과한 행위에 가족이나 주민까지 애꿎은 피해를 입는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다. 사적 영역에 대한 존중, 생활권 보장이 어느덧 사회적 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도 노조는 마치 정해진 수순을 밟는 것처럼 집 앞으로 몰려가 장송곡이나 상여 소리, 운동 가요가 주택가에 울려퍼지도록 한다.

노조원들은 경찰의 제지나 법원 결정 무시에 따른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소음 기준 위반은 수십만원의 과태료나 벌금에 그친다. 그 돈은 노조의 투쟁기금에서 조달되고, 노조 간부의 전과는 훈장이 된다. 열일하는 선명한 노조의 상징이다. 업무방해 고소 등으로 사태가 번지기도 하지만 결국 회사는 취소나 처벌 불원서 제출로 끝을 맺는다.

삼성전자 노조가 회장 집 앞 집회에서 요구하겠다는 것은 노동 가치 인정이 아니라 제왕의 결단이다. 평소에는 "독단 경영을 멈추라"고 말하더니 지금은 그 권능을 발휘해 "통 큰 결단을 하라"고 압박한다. 이런 직 거래 요구는 정당한 노조 활동의 선을 넘은, 정상적 경영에 대한 위협이자 시스템 부정이다. 투쟁이 성공하면 실무자들이 허수아비가 되고, 주요 노사 이슈가 오너의 마음에 종속된다. 기업 거버넌스 퇴보가 아닐 수 없다. 세계 산업을 이끄는 한국의 1등 기업 노조에 걸맞지 않은 부끄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