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훈 성신여대 교수


한국은 더 이상 자본이 부족한 나라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본은 인적 자본이 아니라 물적 자본, 즉 기계·장비·공장과 같은 생산설비를 뜻한다. 물적 자본의 효율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지표가 한계자본계수(ICOR)다. 이는 국내총생산(GDP) 1단위를 추가로 늘리기 위해 필요한 투자량을 의미한다.


한국의 한계자본계수는 1990년대에는 4~5 수준이었으나, 2020년대에는 8~9까지, 기간에 따라서는 10 이상으로 상승한 것으로 추정된다. GDP를 1% 늘리는 데 필요한 투자 규모가 과거보다 두 배 이상 커진 셈이다. 이는 자본 축적이 성장을 견인하던 시대가 끝나가고 있음을 뜻한다. 한국의 자본 효율성은 주요 선진국과 비교해도 빠르게 하락하고 있으며, 머지않아 장기 저성장을 겪어 온 일본 수준으로 떨어질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이제 한국 경제에서 물적 자본은 더 이상 희소한 자원이 아니다.

자본은 경제적 자본과 사회적 자본으로 구분할 수 있다. 경제적 자본의 핵심인 물적 자본은 넘쳐나지만, 사회적 자본은 빈약하고, 특히 사회적 자본의 핵심인 신뢰 자본은 빠르게 고갈되고 있다. 신뢰 부족의 문제는 수많은 분야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최근 미국은 막대한 국방자산을 동원하여 이란 영토에 추락한 자국 장교 한 명을 구출했다. 이런 경우를 보고 국민은 국가를 신뢰하게 된다. 과연 우리 국민 중 자신이 위기에 처했을 때 국가가 전력을 다해 나를 구하리라 확신하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신뢰의 부재는 국가와 국민 사이에만 있는 문제가 아니다. 신뢰가 사라진 여야관계는 토론이 사라지고 고함만 난무하는 불신의 광장으로 추락하고 있다. AI 혁명으로 노동시장의 근본적 변화가 예고된 지금, 새로운 노동시장 시스템의 유력한 대안은 유연안정성(Flexicurity)의 확대다. 그러나 노사는 상호 불신의 늪에 빠져 있고, 안정성과 유연성을 동시에 높이는 새로운 대안에 대한 논의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최근 한국 대표 반도체 기업에서 불거진 갈등 역시 본질은 신뢰의 문제다. AI 혁명의 격랑 속에서 현재의 막대한 영업이익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없다. 일시적으로 급증한 이익은 미래 투자의 재원으로 활용되어야 한다. 그것이 중장기적으로 근로자, 기업, 주주 그리고 국민 모두를 위한 길이다. 그러나 미래 투자가 결국 나의 소득과 고용을 지켜줄 것이라는 신뢰가 없다면, 미래는 사라지고 당장의 분배 요구만 남는다. 결국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선택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정책 영역에서 시장 기능에 대한 불신도 심각하다. 유가 급등기에 최고가격제를 시행하면 가격 신호가 왜곡되고, 오히려 에너지 소비를 부추겨 위기 극복을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시장가격 기능에 대한 불신은 위기의 비용을 더 키울 수 있다.

부동산 정책도 마찬가지다. 주택 정책은 국민의 다양한 주거 수요를 충족시키는 데 주력해야 한다. 취향, 소득, 입지, 연령, 가구원 수, 직장 변동성 등 수많은 변수의 조합을 조정하는 가장 강력한 기제는 시장이다. 그러나 정부는 시장을 신뢰하지 못한 채 수많은 이해관계에 직접 개입해 왔다. 그 결과 시장을 억제하는 데는 일정 부분 성공했을지 모르나, 주거 취약계층인 전세 세입자의 고통은 커졌고 높아진 월세 부담은 서민의 삶을 더욱 옥죄고 있다.


희소해진 신뢰 자본을 축적하는 것이야말로 흐트러진 한국 경제를 근본적으로 되살리는 출발점이다. 신뢰 자본이 늘어나면 경제는 같은 자본과 노동으로 더 많은 성과를 낸다. 경제학 용어로는 총요소생산성이 높아지는 것이며, 이는 성장잠재력을 직접 끌어올리는 효과를 낳는다. 정부 정책에 대한 신뢰가 높아지면 장기 투자가 가능해진다. 노사 간 신뢰가 쌓이면 노동시장 개혁도 감당할 수 있다. 신뢰는 보이지 않는 자본이지만, 불신 때문에 낭비되는 막대한 시간과 비용을 줄인다는 점에서 가장 강력한 생산성 자본이다.

지금 한국 경제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공장과 설비만이 아니다. 물적 자본의 효율성이 떨어진 한국 경제에, 신뢰라는 새로운 자본을 축적해야 한다. 그래야 경제의 심장이 다시 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