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균 경희대 경영대학원 AI비즈니스전공 교수, 인지과학자



한 대학생이 말했다. 뭔가 해야 할 과제가 없어서 불안한 느낌이 든다고. 예전에는 시험 점수가 잘 나오면, 본인이 잘하고 있다고 안도하고, 점수가 부족하면 빈 부분을 채우려 애쓰면 되니까 편했다고. 성적표가 안 나오니 오히려 불안하다고. 얼마 전 시청한 KBS 다큐멘터리 <다큐3일>의 한 장면이다. 참으로 밝고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의 대학생인데, 인터뷰 말미에 시험과 성적표를 그리워하는 얘기를 남겼다.


당신은 고등학교 시절로 다시 돌아가서, 매달 시험 보고, 등수가 적힌 성적표를 다시 받아보고 싶은가? 그때가 뭐가 좋아서 다시 돌아가냐고 반문하는 이도 있겠으나, 나는 영상 속 학생의 마음이 이해된다. 참으로 아프게 이해된다.

예전, 그리 멀지 않은 얼마 전까지, 우리에게는 선명한 목표가 있었다. 대학에서 A라는 학과를 졸업하면, 대부분이 B라는 진로로 흘러갔다. 기업에서 한 직무를 맡으면, 최소한 몇 년, 운이 좋으면 수십 년을 그 일만 하면 됐다. 우리 삶의 흐름은 크게 세 단계였다. 인생의 첫 1/3은 공부하며 준비하고, 다음 1/3은 두어 개 직장에서 안정적으로 보내고, 마지막 1/3은 은퇴하며 여생을 보내는 식이었다. 인생 삼분론이 비교적 명확했다. 그런데 이제 이런 삼분론은 통하지 않는다. 내 수업에는 60대 나이의 석사과정 학생이 보이고, 70세가 넘으신 선배들도 직업 전선에서 물러날 기미가 없다.


요컨대, 내가 젊었던 시절만 봐도, 우리 사회에서 각자의 삶에는 선배들이 걸어간 경로가 내비게이션 안내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각자의 취향, 꿈을 조금만 누른다면, 그 경로대로 안전하게 걸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제 내비게이션이 꺼졌다. 아니다. 먼저 경로를 보여주며 길을 갔던 선배가 말한다. 자신이 걸어온 길대로 따라오면 안 된다고. 그 길은 이미 끊어졌다고 말이다.

모든 게 흔들리고 있다. 사회의 목표, 조직의 목표, 그에 따라 개인의 목표까지 동시에 흔들린다. 젊은 세대는 윗세대에게 묻고, 서로에게 답을 찾아보지만, 그 누구도 명확하게 답을 얘기하지 못한다. 보이스피싱처럼 보이는 강의, 300만 원 내고 자신의 강의만 수강하면 답이 보인다고 현혹하는 저질 온라인 콘텐츠만 범람하고 있다.


"교수님이 제 롤모델입니다." 가끔 이런 말을 듣는 경우가 있다. 나는 이 말이 참으로 부담되고, 틀렸다고 본다. 이 시대에는 롤모델이 없다. 많은 이들이 한 방향으로 일사불란하게 뛰어야 했던 고속 성장형 산업화 시대에는 롤모델이 명확했다. 자신이 바라보는 방향에서 제일 잘 뛰는 사람이 롤모델이었다.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좋게 말하면 무한한 자유와 꿈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두어 명을 롤모델로 삼아 쫓아가는 경로에서 벗어나야 한다. 새로운 시대를 살아야 한다. 한정된 자원으로 산업을 키우던 시대를 넘어서, AI라는 두 번째 지능을 새로운 레버리지로 삼아서 한없는 꿈을 꾸는 시대를 말이다. 여기서 '무한한 자유와 꿈'이란 표현이 불편한 가시처럼 느껴질 수 있다. 미세 먼지 가득한 듯 숨 막히는 현실인데, 무슨 자유와 꿈을 얘기하냐고 말이다. 갑작스레 찾아온 AI라는 거대한 전환이 우리에게 미세 먼지보다 더 큰 압박과 답답함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이 먼지 뒤편에는 그간 우리가 잊고 지냈던 자유와 꿈을 향한 여정이 펼쳐질 수 있다고 말이다.


그때까지 선배가 후배에게, 어른이 아이에게, 그리고 때로는 후배가 선배에게, 아이가 어른에게, 이렇게 얘기해주면 좋겠다. 나도 방향은 잘 모르지만, 그래도 이리저리 발을 내딛다 보면, 좋은 방향이 보일 것 같다고, 네가 사랑하고 빠져들 길을 멋지게 찾을 것이라고, 그때까지 내가 곁에서 친구가 되어줄 테니,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며 지내자고 말이다.

<다큐3일>속 대학생은 젖은 머리로 수건을 들고 버스에 올랐다. 수면 바지 차림, 집 앞에 분리수거할 때 신을만한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그런데 표정은 참 밝았다. 그 학생에게 꼭 얘기해 주고 싶다. 성적표는 없지만, 당신이 오늘 스스로 내린 결정은 충분히 가치 있다고 말이다. 미세 먼지를 통과해서 당신이 걸어갈 꿈의 여정을 응원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