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윤의 시대&뮤직]강소(强小) 콘텐츠 육성이 문화 강대국의 발판이다
임희윤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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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해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기…. 이런 환경과 조건들이야말로 (한 아티스트가) 긴 생명력을 유지하게 하는 큰 전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난 12일 서울 강남구의 작은 극장. CJ문화재단 설립 20주년 기념 '리더스 토크'에 참여한 민규동 영화감독의 말은 적잖은 울림을 줬다. 1999년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로 데뷔한 그는 '파과' '간신' '내 아내의 모든 것' 등의 작품으로 다양한 장르를 종횡하며 선 굵은 필모그래피를 일군 연출자다.
그 역시 한 편, 한 편의 시나리오를 쓸 때마다 실패와 성공 사이의 외줄타기를 해왔다고, 특히나 신인 시절 스스로를 의심할 때 주변에서 내미는 따뜻한 손길과 격려로 버티며 여기까지 왔노라고 털어놨다. 그 불안한 길을 그는 심지어 "지옥길"에 비유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자서전에서 '매 시나리오를 쓸 때마다 지옥길을 걷는 듯했다'고 했습니다. 신진 창작자분들이 자기만의 작은 지옥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문화재단 분들이 많은 손을 잡아줬습니다."
작은 지옥길을 걸어온 민 감독은 이제 중견이 돼 CJ문화재단의 신진 영화인 지원 사업인 '스토리업'의 디렉터이자 멘토로 활약하고 있다. 가능성을 증명할 단 한 번의 기회 자체를 얻는 것조차 힘겨웠던 신인 시절을 떠올리며 그는 '절실한' 후배들에게 더운 손길을 내밀고 있다.
얼마 전, 제79회 칸 영화제가 폐막했다. 나홍진 감독의 기대작 '호프'는 수상에 실패했지만 한국 신진 창작자의 결실이 떠들썩한 뉴스 사이로 반가운 새싹처럼 고개를 내밀었다. 학생 영화 부문 '라 시네프' 시상식에서 진미송 감독이 2등상을 받은 것이다. 진 감독은 뉴욕으로 이민 간 4인 가족의 하루를 담은 15분짜리 단편 영화 '사일런트 보이시스'로 수상의 영광을 누렸다.
'사일런트 보이시스'라니…. 의미심장한 제목이다. 대중문화계에도 수많은 '조용한 목소리들'이 있다. 숨죽인 채 자신의 잠재력을 제련중인 이들에게 첫 번째 마이크를 건네주는 일은 소중하다. 최근 3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살목지'. '장화, 홍련'을 제치고 23년 만에 한국 공포 영화 흥행 1위 기록을 새로 쓴 이 작품은 1995년생 이상민 감독의 솜씨다.
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했지만 한국 영화 시장의 침체기에 졸업해 사회에 나온 그는 CJ문화재단 '스토리업' 지원작으로 단편 '돌림총'이 선정되면서 주목을 받았다. 이후 여러 영화제에 초대되며 데뷔작 '살목지'에 이르렀다. '작은 지옥길'을 지나 마침내 '작은 꽃길'에 다다른 데는 고사의 위기에 물과 거름을 내준 작은 지원의 힘도 있었다.
신진 창작자 지원의 효과는 지원금과 멘토링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당장 100만 장 판매, 1000만 관객 돌파, 1억 조회수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지원작 선정을 위해 업계 동료들과 경쟁하는 것부터가 그들에겐 가장 중요한 창작 욕구, 동기부여가 된다. 작은 음악가들도 그렇다. 인디 밴드 멘토링을 하다 보면 'CJ튠업에 선정된다면 원이 없겠다' 'EBS 스페이스 공감-헬로루키에 당선된다면 날아갈 것 같다'는 1차 목표를 말하며 눈을 반짝이는 신예들을 늘 만나게 된다.
우린 언젠가부터 'K-컬처 대박'의 신화 앞에 너무 많은 것만 바라고 또 바라보게 된 건 아닐까. '빌보드 1위' '황금종려상' '그래미 후보 등재' 같은 'SF적 성과'에만 열광하기엔, 우리 곁에서 조용히 어깨를 움츠린 '작은 거인'들이 너무 많다. 등잔 밑에서 반짝이는 반딧불이들을 손등에 올려놓고 더 나아가 거인의 어깨로 향하는 사다리에 놓아줄 손길이 절실하다.
요즘 가요 종합차트에서 케이팝과 함께 맹위를 떨치는 록 싱어송라이터 한로로. 그도 'CJ 튠업'을 비롯한 여러 신인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창작의 날을 벼렸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극소수의 거인 콘텐츠만이 아니다. 작지만 강한 창작자에 대한 기업과 국가의 지속적인 주목과 지원이야말로 작지만 큰 징검다리가 돼줄 것이다. 강소(强小) 콘텐츠가 풍부한 나라야말로 문화 강대(强大)국이다.
임희윤 문화평론가는 동아일보, 헤럴드경제 문화부 기자로 15년간 현장을 누볐다. 글쟁이, 라디오 게스트, 강연자, MC로 클래식 음악부터 여행 문화까지 다양한 분야를 다루고 있다.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국립국악원 운영자문위원 등을 맡고 있으며 '예술기: 예술과 기술을 이야기하는 8인의 유니버스', '망작들 3: 당신이 음반을 낼 수 없는 이유',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총괄 기획 및 공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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