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 선종의 종찰'로 대접 받는 전남 장흥의 보림사(寶林寺)는 고즈넉한 매력이 돋보이는 절집. 가지산(迦智山, 510m) 기슭에 있으면서도 앞과 옆이 확 트인 평지사찰이다. 번창했던 시절엔 1000명이 넘는 선승들이 수도를 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널찍한 경내엔 국보급 유물이 즐비하다. 거기에 봄볕이 한창이다.

'선종의 뿌리'라는 뜻의 선종대가람(禪宗大伽藍)이란 현판이 걸려있는 일주문인 외호문(外護門)을 지나면 곧 사천왕문. 양쪽에 버티고 서있는 보림사 목조 사천왕상(보물 제1254호)은 여느 절집의 그것과는 격이 조금 다르다. 1515년(중종 10)에 조성됐다는데, 이는 지금까지 조사된 조선시대 사천왕상 가운데 조성 연대가 가장 빠르다. 또한 임진왜란 이전 것으로는 유일한 작품이다. 조각 수법도 아주 우수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국보급 고서적 쏟아져 나온 사천왕상
놀라운 것은 이 사천왕상 안에서 유물이 수두룩하게 나왔다는 사실이다. 1995년 이 사천왕상의 무릎과 발 등에서 희귀본인 월인석보 제25권을 비롯해 국보급 고서적 250여권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이 고서적들은 임진왜란 이전의 인쇄 문화와 언어, 사회상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보통 사천왕상이나 본존불의 등쪽을 파고 그 속에 복장유물을 보관하는데, 보림사 사천왕상의 경우처럼 발바닥 속까지 고서적으로 가득한 경우는 보기 힘들다고 한다. 선종 종찰이라는 절집의 위상 덕에 사천왕상을 조성할 때 깊은 신앙심으로 발원(發願)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경내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대적광전으로 가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철불에 절을 올린다. 국보 제117호인 이 비로나자 부처님은 858년에 쇠 2500근으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왼팔 뒤쪽에 새겨져 있다. 12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당당한 모습으로 중생을 굽어보며 얼마나 많은 소원을 들어주셨을까.
철불 앞에서 삼배를 올렸으면 대적광전에서 물러나와 동백나무 그늘 아래 샘솟는 보림약수 맛을 봐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빠지지 않는 물맛을 자랑하는 이 약수는 뒷맛이 약간 쌉쌀한데 그 이유는 대웅보전 뒤편에 있는 울창한 비자나무숲과 대나무숲, 그리고 차밭의 영향이라고.

한편 보림사 뒤쪽의 비자나무숲은 지난해 가을, 생명의 숲 국민운동본부와 유한킴벌리 등이 공동으로 주관하는 제10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됐다. 절집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비자림 삼림욕 산책로가 가지산 등산로와 연결돼 있다.

이곳에 최초로 절집이 들어앉은 것은 신라시대. 원표(元表)가 세운 암자에다 860년경 신라 헌안왕의 권유로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 804~880)이 창건하면서 맨 먼저 선종이 정착된 절집이다. 우리나라 불교는 이심전심(以心傳心)과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종지(宗旨)로 삼는 선종, 그리고 경전을 해석하고 염불을 외우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는 교종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신라는 교종의 시대다. 그런데 8세기 후반 선종의 뿌리가 된 도의(道儀)선사가 등장한다. 도의는 784년(선덕왕 5)에 당나라에 유학해 서당 지장(西堂 智藏)에게 깨침을 받은 승려로 821년에 귀국해 선종을 전파했다. 그렇지만 기존의 승려와 귀족들로 이루어진 왕권 불교의 질서에서 그의 교리는 대접받지 못했다. 결국 도의는 때가 아직 이름을 깨닫고 서라벌을 떠나 설악산 기슭에 진전사를 짓고 참선에 몰두했다. 이후 도의의 사상은 염거(廉居)를 거쳐 체징으로 전해지면서 지금의 조계종으로 발전했다.
즉 조계종의 종조로 모셔진 도의선사의 제자 보조선사가 이곳 가지산에 머물러 보림사를 개창하면서 도의의 사상은 비로소 꽃을 피우게 됐고, 이후 보림사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으뜸 사찰이요, 가지산파(迦智山派)의 근본도량이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 위상만큼 이야깃거리가 넘치는 절집인 보림사에서 차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다인(茶人)들 사이에서 보림사는 최근 복원 작업에 박차를 가하는 청태전(靑苔錢)이라는 차로 이미 잘 알려진 절집이다. 보림사 사하촌에서는 대대로 동전 모양으로 만든 돈차(錢茶, 떡차)를 만들었고, 이 차제조법은 보림사 승려와 사하촌 할머니들에게 전승돼 왔다. 그런데 '청태전'이라는 이름은 애초에 우리나라에서 사용해왔던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장흥의 돈차를 처음 본 일본인들이 당시 푸른곰팡이가 피어 있는 오래 묵은 돈차를 보고 이름 지은 게 시초다.

야생 차나무의 역사가 깊은 장흥

차에 대해 안다는 사람들도 장흥 야생차의 뿌리가 깊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려와 조선조 초기에 전국 차소(茶所) 19개소 중 무려 13개소가 이 장흥에 있었다. 지금도 가지산 보림사 주변과 천관산 기슭 등 장흥의 7개 지역 약 30ha 이상에 야생차가 자생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장흥 주민들 중엔 봄철이 되면 차나무가 있는 야산을 돌아다니며 찻잎을 따는 이들이 적지 않다.

보림사 스님의 말을 빌면 장흥엔 차를 만들었던 다소가 전국에서 가장 많았던 곳으로 상납되는 차의 양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상납하고 남은 늦은 잎으로 민간에서 마시는 돈차가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측한다. 특히 보림사 돈차는 조선 후기엔 제법 유명세를 떨쳤는데,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절집이나 사하촌에서 돈차를 제조했다고 한다. 요즘도 절집 뒤쪽 산기슭엔 차밭이 있어 스님들이 직접 찻잎을 따고 덖어 차를 만든다.

하지만 보림사의 돈차가 원래부터 유명했던 것은 아니다. 강진에 귀양 와 있던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이 보림사 뒤쪽 대밭에 차나무가 많이 자라는 것을 보고 절의 승려들에게 차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면서 보림사 차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됐다.

이 차의 명성은 조선 후기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기록에 자세히 남아있다. 그의 저서 <임하필기(林下筆記)> 가운데 호남사종(湖南四種)이란 항목엔 '보림사의 죽전차(竹田茶)는 열수 정약용이 얻었다. 절의 승려들에게 구증구포 방법으로 가르쳐 주었다. 그 품질이 보이차에 밑돌지 않는다. 곡우 전에 딴 것을 더욱 귀하게 치니, 이를 일러 우전차(雨前茶)라 해도 괜찮다'고 적었다. 또한 이유원은 문집인 <가오고략(嘉梧藁略)>에 죽로차(竹露茶)란 제목의 장시를 지어 보림사 차를 예찬하고 있다. 다음은 그 시의 일부다.

심양 시장 보이차(普洱茶)는 그 값이 가장 비싸 / 한 봉지에 비단 한 필 맞바꿔야 산다 하지. / 계주(稽州) 북쪽 낙장(酪漿)과 기름진 어즙(魚汁)은 / 차를 일러 종을 삼고 함께 차려 권한다네. / 가장 좋긴 우리나라 전라도의 보림사니 / 운각(雲脚)에 유면(乳面)이 모여듦 걱정 없네. / 번열(煩熱)과 기름기 없애 세상에 꼭 필요하니 / 보림차면 충분하여 보이차가 안 부럽네.

여행정보
●교통 경부고속도로→천안돚논산고속도로→호남고속도로→광주→13번 국도→나주→23번 국도→820번 지방도→보림사 <수도권 기준 5시간 소요>

●숙박 보림사에서 전통문화 선다(禪茶)를 체험할 수 있는 템플스테이(061-864-2055, cafe.naver.com/bolimsa)를 운영한다. 사찰예절, 새벽예불, 108배, 좌선 등을 체험한다. 매주 토요일(15:00)~일요일(11:00) 1박2일이다. 평일은 자율적인 템플스테이가 가능하다. 참가비 1인 1만원. 보림사 바로 앞엔 숙식할 곳이 마땅치 않다.

●별미 장흥 읍내 중앙에 위치한 장흥시장은 예로부터 나주 영산포 홍어시장, 함평 학다리 우시장과 더불어 전라남도의 3대 시장으로 꼽혀왔다. 산업화사회로 접어들면서 점차 퇴락했지만, 최근 토요장터를 열면서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5일장(2·7일장)도 그대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민속광장 토속음식점에서는 계절에 따라 키조개·낙지·바지락·쭈꾸미·전어 등 해산물을 비롯해 장흥 한우를 싼값에 맛볼 수 있다. 또 두릅·취나물 등 봄나물도 많이 나온다.

●참조 장흥군청 061-863-70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