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의 저서인 <무소유>의 중고책이 3월11일 법정스님 입적 이후 19일까지 '알라딘 중고샵'에서 평균 5만800원에 거래되었는데 이는 새 책의 정가인 8000원의 6.35배에 달합니다. 경매사이트인 옥션에서는 1993년 증보판(39쇄)이 3월26일에 무려 110만원대에 실거래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단법인 맑고향기롭게는 법정스님의 49재인 28일까지 새 인지를 발급하고, 출판사들은 7월30일까지 책을 출고하여 올해 말인 12월31일까지 판매하는 것으로 전해졌습니다.(머니투데이 4월1일 기사 “'무소유' 등 법정스님 책 올해까지 살 수 있다”)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에 가져가지 않으려 한다"는 뜻으로 책의 절판을 유언한 것이 오히려 법정스님의 중고책이라도 소유하려는 분위기를 과열시켰던 것입니다. <무소유>를 ‘소유’하려는 아이로니컬한 모습입니다. ‘책을 소유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소유의 정신을 소유하는 것’이 스님이 평소 하신 말씀을 소화하는 진정한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지만 물질의 혜택을 받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유에 대한 욕망은 당연한 것 아닌가. 무소유의 정신은 비현실적인 이상에 불과한 것 아닌가, 하는 지적도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무소유의 정신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오래 전 어떤 초등학교에서 '우리집'을 주제로 아이들이 글짓기를 했었을 때 어떤 아이가 써 낸 글이 대충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우리집에는 어마어마하게 넓은 잔디밭이 있다. 잔디밭 주위에는 봄이면 수십그루의 목련이 예쁘게 피어난다. 벚꽃, 개나리, 진달래도 너무 너무 많다. 잔디밭 가운데에는 수십미터 길이의 어마어마하게 큰 연못이 있다. 우리집에 친구들이 놀러오면 연못가에 나가서 같이 뛰어논다. 아이들은 우리집을 너무 부러워한다. 우리집을 지켜주는 경비 아저씨는 나에게 너무 친절하다….”

 

이 글을 본 사람은 아이의 집이 엄청난 갑부집인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아버지 직장인 기관의 사택에서 살고 있었으며, 그 사택이 있는 부지가 아이 글에 묘사되어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그 글을 보면서 저는 과연 '집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하였습니다. 원래 집의 의미는 주거의 수단이었는데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는 투자의 수단으로까지 변화돼 있습니다. 본 글에서는 투자의 수단이라는 측면은 다루지 않고 주거의 수단이라는 측면에서만 이야기를 진행하겠습니다.

 

집이 주거의 수단이라는 측면에는 여러 의미가 내포돼 있습니다. 주거의 의미를 예전에는 먹고 잠자는 공간으로만 주로 인식했었습니다. 제 어떤 친구는 어려서 단칸방에 일곱식구가 살았었습니다. 말 그대로 집이 먹고 잠자는 공간으로서의 기능만 충족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나 경제수준과 생활수준이 높아짐에 따라서 보통 사람들에게도 집의 의미가 다양해졌습니다. 먹고 잠자는 공간이외에 편한 휴식의 공간, 공부하는 공간, 즐기는 공간, 전망을 바라보는 것처럼 정신적인 만족감을 채워주는 공간 등, 다양한 기능을 집을 통해서 얻어내고 있습니다.

 

어떤 초등학생의 글짓기에 등장한 우리집도 바로 그러한 점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집 내부 공간을 제외한 외부 공간을 글에 묘사한 것입니다. 외부 공간은 그 집 소유도 아니었고 외부 공간을 활용하는데 돈을 따로 내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집 외부 공간을 일상생활 속에서 마음대로 활용해 집안과 집밖을 연결시키면서 총체적인 측면에서 우리집 개념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 아이처럼 우리집을 사용의 개념으로 바라보면 돈을 적게 들이면서도 풍요로운 마음으로 '내집'을 만끽하면서 살 수 있음이 인정됩니다.

 

◆저의 큰 아이가 초등학생일 때에 이와 비슷한 개념의 얘기를 해준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는 월세 내는 집에 살던 시절로서, 어느 날 아이가 “왜 우리는 집이 없어요?”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답변하기를 “집이란 편하게 두다리 쭉 뻗고 잠잘 수 있고 편히 지낼 수 있으면 되는 거란다. 예전에는 천장에서 빗물이 새어 방안에 떨어지는 집들도 많았고 장마가 크게 나면 물에 잠겨 고생하는 동네가 서울에 많았단다. 지금은 그런 일 없이 지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집에 사는 것이냐. 지금 집 앞에 나가면 바로 근처에 공원이 있고 어린이 놀이터가 있고 네 마음대로 거기에서 놀아도 되니 그곳도 우리집이고, 네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곳이 전부다 우리집인 것이다.” 아이가 소유의 개념을 알게 되면서 우리는 왜 집이 없느냐고 질문을 한 것인데, 저는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사용의 개념으로서 집을 얘기한 것입니다.

 

동네에서 공원을 자주 산책하고, 체육시설도 이용하고, 공공도서관도 이용하고, 아이들이 어려서는 공공기관에서 무료 상영하는 영화를 가족들과 보기도 했습니다. 동네 야산에도 자주 올라가서 멀리 전망을 내다보면서 정말로 서울은 아름답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에는 돈이 한푼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공원을 자주 이용하면 내집 담장 안의, 또는 내 아파트 단지의 정원보다 몇배 더 멋있고 몇배 더 큰 정원이 내 것이 됩니다. 집근처 야산에 올라가서 전망을 즐기는 시간을 가질 때 그 야산은 우리집 테라스가 됩니다.

 

공공도서관에서 수천권의 책과 수십 종류의 잡지책과 신문을 내 마음대로 본다면 그 도서관은 우리집 서재가 됩니다. 개인적으로 집안에 큰 서재를 갖추어놓고 큰 돈 들여 수백권 책을 보유하고 몇종류 잡지를 구독하는 것보다 수백배 이상 능가하는 효과를 얻어 냅니다. 저희 아이들은 집근처 공공도서관에서 공부한 적도 많았고 그럴 때 도서관은 우리집 아이의 공부방인 것입니다. 집에서 싸가지고 간 도시락을 지하식당에서 먹을 때 그 곳이 우리집 식당이 됩니다. 식당에는 생수통이 있어서 집에서 생수 사먹는 것과 달리, 공짜로 생수를 마음대로 마실 수 있습니다.

 

유아실에는 바닥이 푹신한 재료로 깔려 있고 유아용 책과 유아용 컴퓨터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에 아내가 아이들을 그곳에 자주 데려가면서 그 방을 관리하는 전담사서와 친해졌습니다. 그 뒤 아내가 외출할 때 아이를 그 곳에 넣어두고 엄마 올 때까지 지내게 하였습니다. 사서가 저희 아이에게 신경써주는 것은 공짜로 집에 아이 봐주는 사람을 둔 것과 비슷한 효과였습니다. 집에서 PC를 구입하기 이전에는 도서관의 PC실을 우리집 거실처럼 아이들이 이용하였습니다.

 

공동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논다면 그 놀이터는 우리집 앞마당인 것입니다. 동네 체육시설을 이용하면 고급주상복합건물 내부에 갖추어진 체육시설을 이용하는 것과 비슷한 효과가 얻어집니다. 대형 아파트단지 안의 놀이터에 농구대까지 잘 설치해 놓았지만 막상 아이들이 농구공 가지고 놀면 주민들이 시끄럽다고 하여 무늬만 갖춘 셈입니다. 그러나 공공장소의 놀이터 농구대에서는 마음 편히 얼마든지 공 가지고 뛰어놀 수 있습니다. 공공시설의 실내수영장을 이용하면 내집에 수영장을 갖추고 있는 셈이 됩니다. 이용료를 내더라도 집에서 수영장을 갖추고 유지하는데 들어가는 돈과 비교하면 오히려 절약입니다.

 

집의 거실에 고가의 미술품을 걸어두고 바라볼 때에 그 미술품은 늘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박물관과 미술관에 가면 다양한 미술품과 각종 작품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날씨가 좋을 때는 시청 앞을 비롯하여 시내 곳곳에서 무료 공연이 종종 있어서 콘서트를 내집에서 돈 안들이고 연다고 생각해도 됩니다. 무척 비싼 초대형 고급저택이나 고급아파트에 살지 않아도 돈을 별로 들이지 않으면서 높은 문화수준을 누리며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집의 개념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자연환경 및 공공의 시설과 공공의 서비스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비슷한 삶의 질을 달성하면서도 경제적인 삶이 가능해집니다. 원래 사물을 ‘소유’의 개념이 아닌 ‘사용’의 개념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주어진 여건에서 주어진 경제사정에서 종종 효율적이고 풍요로운 삶이 달성됩니다. 주거수단인 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러미 리프킨은 유명한 저서인 <소유의 종말>에서 '소유', '상품화'와 함께 시작되었던 자본주의가 '소유'가 아닌 임시적인 '접속 (access)'으로 변해간다고 미래상을 제시했습니다. 이 글에서 ‘사용’이라고 표현한 것은 ‘접속’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접속은 지금은 인터넷에서 익숙해진 개념이 되었지만 컴퓨터나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의미를 넘어서서 자동차, 주택, 가전품, 유아용품, 전문의상, 공장, 체인점 같은 다양한 실물 영역에서도 일관되게 확산되는 트렌드입니다. 자동차에서 렌트와 리스 개념도 이제는 낯설지 않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집을 사지 말고 평생 월세나 전세로 살거나 임대주택에 살자는 것이냐”고 혹자가 말한다면 이 글을 제대로 이해 못한 셈입니다. 접속의 활용성과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이지 소유의 의미와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유와 접속, 둘 다 나름대로 유용성이 있습니다. 접속에 해당하는 ‘무소유’를 ‘소유’와 적절히 혼합하는 삶이 적은 비용으로 편리성과 질을 높이는 효율적인 방법이 될 것입니다.

 

소유는 자기 존재 영역을 나타내는 힘이 되고 여러 측면에서 유리하고 좋은 점이 있지만, 때로는 부담스러운 점도 있습니다. 더욱이 변화와 혁신이 빠르게 이루어지는 시대에는 소유가 불리한 경우도 많습니다. 상품의 주기가 짧아지고 혁신과 업그레이드가 빠르게 이루어지는 세상에서는 과잉생산으로 쌓아 놓은 물건들이 하루아침에 지나간 고물이 되기 쉽습니다. 따라서 무조건 소유만이 좋다고 바라볼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서는 소유가 아닌 접속을 통한 사용이 더 적절한 선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산업시대는 소유의 시대였지만 IT시대에서 접속의 개념이 본격적으로 생겨났으며, 새로운 분야, 새로운 사업도 접속의 개념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빌려주는 형태의 사업들도 접속의 시대에 나타나는 사업들입니다. 지난 미국발 금융위기는 자기돈 10% 가지고 주택을 ‘소유’하는 모기지론 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불과 자기돈 10% 가지고 주택을 소유하는 것은 과도할 정도로 소유에 대한 집착을 낳게 되고, 주택가격의 변화에 따라서 대박과 쪽박이 둘 다 가능한 형태가 됩니다.

어떤 것에서든지 소유가 아닌 접속의 개념이 사회적으로 확대되면서 우리의 삶을 좀 더 안전하고 편안하면서도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또한 사물을 소유를 통하여 고정시키는 것보다는 접속을 통하여 사용할 때에 빠르게 변화해가는 것들을 유연하게 잘 수용하고 활용하여 삶의 질이 오히려 더 높아질 수도 있습니다. 또한 사물을 생산하여 다른 사람에게 공급하여 소유하게 해주는 경우보다 다른 사람에게 접속하게 하면서 사용료를 받는 경우에 과잉생산이 줄어들고 합리적인 수요공급의 관계를 맞추어가기 유리합니다. 그것은 길게 보면 지구의 환경보전과 자원절약에 기여하는 결과도 얻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