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님. 입출금통장을 농협에서 만들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주세요."
지난 4월28일 A씨는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NH농협은행에서 신규통장 개설을 의뢰했다가 황당한 말을 들었다. 신규통장을 개설하고 싶다면 통장을 만드는 구체적인 목적과 이를 증명할 수 있는 증빙서류를 제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A씨를 응대한 농협은행 직원은 "지난 3월 말부터 통장을 개설하는 목적이 있어야 입출금통장을 개설할 수 있도록 내부규정이 강화됐다"며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신분증과 도장(혹은 서명)만 가지고 은행을 찾았던 A씨로선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금융거래제한자도 아닌데" 통장개설 거절
B씨도 같은 일을 겪었다. 지점은 달랐지만, 입출금통장 개설에 '구체적인 사유'가 필요하다며 당장 신규통장 발급이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B씨는 "금융거래제한자도 아닌데 통장을 만드는 일에 별도의 사유가 필요하냐"고 반문했고, 행원은 "내부 방침이 그렇다"는 말만 거듭했다. 불쾌해진 B씨는 신규통장 개설은 고사하고 기존에 있던 계좌마저 해지하고 왔다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A씨와 B씨의 사례 외에도 농협은행에서 신규통장 개설을 의뢰했다가 헛걸음한 이들이 적지 않다. 이는 농협은행이 지난 3월27일 '대포통장과의 전쟁'을 선포하며 신규통장 개설에 대한 내부지침을 강화한 데 따른 것이다.
농협은행에 따르면 지난 3월27일 이후 전국의 모든 지점은 입출금통장 개설 시 ▲첫 거래 고객이나 장기 미거래 고객 ▲거주지와 직장 주소가 신청지점과 먼 고객 ▲단순한 입출금 용도 ▲거래목적이 불분명한 이들에 대해 '추가 증명자료'를 요구하고 있다.
금융거래 목적 확인과 함께 증빙자료 제출이 이뤄진 경우에만 신규통장 개설이 허가되는 것이다. 증빙자료는 거래 목적에 따라 재직증명서, 원천징수영수증, 가족관계증명서 등으로 구분된다.
반면 농협을 제외한 KB국민은행·우리은행·신한은행·하나은행·SC은행 등 일반 시중은행은 성인고객의 경우 신분증만 있으면 별도의 서류 없이 신규통장을 개설해준다.
이와 관련 농협 관계자는 "최근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른 보이스피싱을 예방하고 대포통장을 근절하기 위한 내부 방침"이라며 "농협의 대포통장 비율이 높다보니 선량한 고객에게 더 큰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불가피한 정책"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금융감독원은 지난해 8월 대포통장 발급실태를 분석한 결과 전체 대포통장 3만6417건 중 68%인 2만4740건이 농협회원조합과 농협은행에서 개설됐다고 밝혔다.
이후 금감원은 대포통장 발급비중이 현저하게 높은 농협을 지도하기 위해 현장점검 등을 실시했다. 그러나 여전히 농협은 '대포통장 1위'라는 오명을 씻지 못한 상태.
이에 농협 관계자는 "농협의 대포통장 비율이 매우 높은데 최근 신규통장 발급기준을 강화하면서 대포통장 비율이 줄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대포통장과의 전쟁,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울라"
문제는 신규통장의 개설도 함께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농협 측은 통장발급률 공개를 꺼렸으나 기자가 만난 한 농협은행 직원은 "복잡한 개설과정 때문에 신규가입이 많이 줄어든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은행에서 오랜 시간 기다린 고객들이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화를 내는 경우가 많다"면서 "창구에 있는 직원들의 스트레스가 상당하다"고 토로했다.
이에 조남희 금융소비자원 대표는 "타 은행에 비해 농협이 필요이상으로 절차를 까다롭게 만든 것 같다"고 지적했다. 조 대표는 "경쟁력 차원에서도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고 덧붙였다.
농협도 이 같은 상황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농협 관계자는 이를 '양날의 검'에 빗대며 "고객이 다소 불편을 겪을 수 있지만 큰 틀에서 봤을 때 범죄로부터 고객의 피해를 방지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친절서비스 영업을 해야 하는데 고객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해야 하는 우리의 심정도 헤아려 달라"면서 "다만 직원을 대상으로 관련 교육을 실시하는 등 민원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이 같은 농협의 내부지침에 고객들은 단단히 뿔이 났다.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받는 듯한 느낌이 들어 불쾌함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금감원이 제시한 대포통장 근절책에는 계좌개설 시 의심거래로 판단되는 고객에 대해 추가 증빙자료를 요청하고, 예금계좌 개설목적과 신원 확인절차를 거쳐 통장발급 여부를 판단하는 방안이 담겨 있다.
금감원이 밝힌 의심거래로 판단되는 고객은 ▲단기간 내 다수의 계좌 개설 ▲제3자와 동행해 통장관련 문의를 인계 ▲마스크·모자 등을 착용해 본인여부 식별이 곤란한 경우 등이다.
금감원은 자료제출을 거부하거나 검증결과 대포통장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높은 경우에 한해 계좌개설을 거절하고, 대포통장 활용이 의심되는 경우 계좌개설 후 각 금융사별 '의심계좌모니터링시스템'에 등록해 점검해야 한다고 지시사항을 내린 바 있다.
그러나 농협 측은 '의심거래로 판단되는 고객'이 아닌 일반고객에도 이를 적용해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일각에선 순수한 의도로 신규통장을 개설하려는 고객을 '잠재적 범죄자'로 여기는 게 아니냐며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 되지 않도록 고객의 불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금감원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농협이 자체적으로 내부지침을 강화한 것 같다"며 "금감원에서 별도의 지도사항은 없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절차가 번거로워짐에 따라 고객 불편이 심화될 수 있겠지만 특정은행의 내부 방침에 따로 할 얘기는 없다"고 덧붙였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30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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