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기념관
다산 정약용은 정조의 페르소나 같은 존재였다. 정조가 1752년생, 정약용이 1762년생 나이차이는 10살이다. 22살에 진사에 합격한 정약용은 성균관에 입학하고 이때 정조의 눈에 들었다. 28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 경기도 암행어사, 동부승지, 병조참의, 우부승지, 형조참의 등으로 활약했다. 특히 ‘수원화성’은 정조가 기획하고 정약용이 실행한 두 사람의 합작품으로 두고두고 역사가 극찬할 역작이다.
다산 정약용은 실학자였다. 많은 실학자들이 그랬듯이 그 또한 천주교의 영향을 받았고, 이것이 노론벽파에게 좋은 구실이 된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서거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천주교 탄압이 시작됐다. 상대파에게 있어 눈엣가시였던 정약용 일가 또한 무사할 리 없었다. 셋째형 약종은 사형되고 둘째형 약전은 신지도에서 흑산도로, 약용은 경상도에 유배됐다가 투옥된 후 이곳 강진으로 유배 온다.
다산기념관에서는 정약용의 생애와 업적을 살펴볼 수 있다. 다산의 영정부터 다산연보, 가계도, 학통, 일생, 유물 등이 다양한 형태로 전시돼 있다. 저서가 워낙 많다 보니 제목만 훑어보고 지나가도 시간이 꽤 걸리는데 어려운 한자들이라 까막눈이 따로 없다. 그래도 몇가지는 들어본 게 있으니 그만큼 역사서와 교과서에 많이 등장해서일 것이다.
인상적인 것은 하피첩과 매화병제도다. 이것은 다산이 부인의 치마폭에 쓰고 그려서 자녀들에게 준 글과 그림이다. 학연과 학유 두 아들에게는 훈계의 내용을 적어 보냈고, 그로부터 3년 뒤 시집가는 딸에게는 그림을 그려 보냈다. 강진으로 유배 올 때 8살이었던 딸이 21살이 돼 시집을 가게 된 것이다. 그는 14년 동안 딸을 보지 못했다. 수백권의 책을 저술한 그였지만 몇마디 글로 마음을 표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매화 가지 위에 앉은 새 한쌍을 그려 딸에게 보냈다.
전시관에서는 다산의 생애 모습도 살펴볼 수 있다. 애니메이션이나 가상체험을 통해 다산의 생애를 쉽고 재미있게 알아보고 해설사의 설명을 통해 책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렵거나 다소 딱딱할 수 있는 다산의 학문과 업적을 듣는다. 다산 일생의 주요 장면들을 디오라마로 보고 수원화성의 경우는 전시관 한 코너를 통해 그 위대함을 느낀다. 화성성역의궤와 같은 책과 함께 거중기와 수원화성을 재현했다. 이곳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다.
◆다산초당
어쨌든 다산은 죄인 신분이었다. 유배 초기에는 대역죄인을 거두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 주막집 노파의 신세를 졌다. 그는 주막 뒷방에 ‘사의재’라는 당호를 짓고 4년을 지냈다. 이후 보은산 고성암 보은산방에 4년, 그리고 강진에서 제자가 된 ‘이청’의 집에 머물렀다. 1808년 윤규로의 산정이었던 이 초당에 자리를 잡았고 1818년 귀양에서 풀릴 때까지 10년간 생활하면서 <목민심서>를 비롯한 수백권의 책을 저술하고 실학을 집대성했다.
다산초당은 만덕산에 있다. 다산초당으로 향하는 오솔길은 걷는 맛이 있다. 봄에는 대숲과 동백, 소나무숲이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조금 오르다 보면 흙 위로 드러난 소나무 뿌리가 불규칙한 계단을 만든다. 오는 사람마다 이 길이 인상적이었는지 정호승 시인의 ‘뿌리의 길’이라는 시도 한수 접할 수 있다. 무덤도 하나 만날 수 있는데 이것은 윤단의 손자이자 정약용의 제자였던 윤종진의 무덤이다. 그리고 마침내 초당에 이른다.
다산초당의 현판은 김정희가 썼다. 추사의 글씨를 여기저기서 집자해 만든 것으로 추정하지만 다산보다 24살 어렸던 김정희가 정약용을 몹시 존경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초당 앞 넓은 바위는 ‘다조’라 한다. 이곳에서 그가 솔방울을 태워 차를 달였다고 한다. 네모난 연못을 파서 잉어를 길렀고 집 뒤에 샘도 만들었다. 이름은 ‘약천’이다. 처음에는 물이 조금 배어 나오던 것을 다산이 직접 파서 물이 고이게 했다는데 지금도 이곳에 물이 있다. 연못에는 인공섬도 만들고 물을 끌어와 작은 폭포도 만들었다고 한다. 수원화성을 만든 주인공이니 이 정도는 그에게 소일거리였겠다. 다산초당을 중심으로 양쪽에 서암과 동암이 있는데, 서암과 초당사이로 몇발자국만 올라가면 정석(丁石)이라는 단정한 두 글자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유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직전에 다산이 직접 새겼다고 전해진다.
서암과 동암은 제자를 가르치던 곳이다. 이곳에서 18명의 제자를 가르쳤고 ‘천여권의 책을 쌓아놓고 스스로 즐겼다’고 전해진다. 그는 주로 동암에 기거하며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한자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저서를 쓴 인물’이라 알려진 다산은 동암에서 그의 저서 500여권 대부분을 집필했다. 그런 세월을 보내는 동안 복사뼈가 3번이나 내려 앉았다고 한다.
동암 옆에는 ‘천일각’이 있다. 이곳은 이후에 세워진 것인데, 다산이 자주 서 있던 곳이라 한다. 구강포 앞바다를 내다 보며 형제를 그리워했을 다산을 상상하며 잠시 쉬어가도 좋겠다.
◆백련사 가는 길
다산은 유배 5년차에 좋은 친구를 만난다. 백련사의 혜장선사는 다산의 벗이 됐다. 천주교 박해로 이곳까지 오게 된 다산이 불자와 연을 맺게 된 것이다. 그들은 산 속 오솔길로 왕래하며 차를 마시고 유학과 불교를 이야기했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가는 길은 800m, 길지 않은 길이다. 이곳에선 대숲, 소나무숲, 키 작은 조릿대가 길잡이 역할을 한다. 분홍빛 진달래가 기분좋게 피었고, 백련사가 보일 때쯤이면 야생차 군락이 펼쳐진다. 과연 ‘차가 많아 만덕산의 별명이었다는 다산(茶山), 정약용의 호가 된 다산’이라 그렇구나 싶다.
그리고 동백숲이다. 빽빽이 들어선 동백나무에는 초봄까지 붉은 동백이 쏟아질 듯 피어난다. 이와 함께 백련사 경내에는 봄꽃이 한창이다. 천리향은 향기를 뿜어내고 꽃을 따라 올라오는 초록이 싱그럽다.
그 때 그 봄, 혜장은 꽃보다 더 환한 미소로 친구 다산을 맞았으리라.
● 여행 정보
☞ 다산기념관(강진) 가는 법
경부고속도로 - 천안논산고속도로 - 당진영덕고속도로 - 서천공주고속도로 - 서해안고속도로 - 2번국도 - 남해고속도로 - 녹색로 - 평동교차로에서 ‘강진, 진도, 완도, 해남’ 방면으로 우측방향 - 강진서부로 - 호산교차로에서 ‘다산초당, 백력산’ 방면으로 좌회전 - 덕남로 - 기룡3길 - 다산로 - 다산초당길
[대중교통]
강진버스여객터미널 – (강진, 망호) 버스 승차 – 다산초당 정류장 하차
[주요 스팟 내비게이션 정보]
강진다산기념관: 검색어 ‘강진다산기념관’ /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다산로 766-20
백련사: 검색어 ‘백련사’, 주소 중 강진 선택 /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백련사길 145
강진다산기념관
http://dasan.gangjin.go.kr
문의: 061-430-3915
관람시간: 오전 9시 ~ 오후 6시 (입장시간 오후 5시 30분까지)
관람요금: 무료 (2015년도 2/4분기 중 유료화 예정)
백련사
http://www.baekryunsa.net
문의: 061-432-0837
< 음식 >
동문주막(사의재): 사의재는 다산이 강진에 처음 유배올 때 주모의 배려로 머물던 동문 주막의 뒷방이다. 다산은 이곳에 ‘사의재’라는 당호를 짓고 4년을 머물렀다. 강진에서는 2007년에 사의재와 동문주막을 복원했고 이곳에서 문화해설사들이 직접 주막을 운영한다. 아욱국과 추어탕, 매생이전 등을 판매한다. 반드시 미리 예약해야 한다.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사의재길 27 / 061-433-3223
< 숙소 >
다산수련원: 다산의 사상을 바탕으로 연수·교육·수련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강진군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숙박과 함께 강당, 체험활동실, 운동장 등을 갖추고 있다. 개별 여행자도 숙박 가능하며 가격대비 좋은 시설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예약 경쟁률이 높다.
http://suryeonwon.gangjin.go.kr
생활관(객실): 1만5000 ~ 5만원
식사: 청소년, 일반 6000원 / 초·중생 5000원 / 유치부 4000원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다산수련원길 33 / 예약문의: 061-430-3625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78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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