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어떻게 식민지배와 6·25전쟁으로 인한 자산파괴를 단기간에 극복하고 세계 10대 경제대국과 민주화를 달성했을까. 삼성전자는 어떻게 반도체와 휴대폰에서 세계 1위가 됐고 방탄소년단은 어떻게 빌보드차트 1위에 올라 K-Pop 열풍을 전 세계로 확산시켰을까. 불과 50년 전까지만 해도 불가능한 것으로 당연시됐던 것들이 기적처럼 현실이 되는 배경엔 무엇이 있을까. ‘홍찬선의 패치워크 인문학’에선 그런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던 우리의 인문학적 바탕을 찾아본다. -편집자-

옛 러시아공사관에서 바라본 남산 /사진=뉴시스 박진희 기자

“서울 사람들은 눈부신 백의를 입고 검은 갓을 쓰고서 거리 풍경에 기묘하게 환상적 이국성을 더했다. 이것은 중국도 일본도 아닌, 지구상 그 어떤 나라도 아닌 철두철미한 한국 본연의 모습이었다. 베이징, 도쿄, 방콕, 상하이도 서울처럼 전신과 전화, 전차와 전기조명을 동시에 가진 것을 자랑하지 못했다…”(독일 여행가 겐테 박사가 묘사한 1901년의 서울)
“서울은 주민들이 남녀 할 것 없이 흰 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더 큰 오물과 똥이 천지인 도시였다. 오물은 집 앞에 그냥 놓여 있었으며 똥을 쓸어내려갈 물이 없기 때문에 막다른 길들이 가장 더러웠다. 사람들은 밤이 되면 집 앞의 땅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잤다. 중국이나 일본 혹은 인도 도시들에서 볼 수 있는 시장과 상점은 이곳에 없다. 서울에 밤이 찾아오면 온 천지가 깜깜하고 여기저기 겨우 희미한 불빛만 깜박거릴 뿐이다…”(오스트리아 작가 헤세-바르텍이 본 1894년 여름의 서울 모습)


1894년과 1901년. 7년 동안 서울에 어떤 일이 생긴 걸까. 도대체 무슨 기적이 일어나 두 사람이 본 서울의 모습은 이처럼 하늘과 땅 차이를 만들었을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우리가 배운 역사 지식을 잠시 되새겨보자.

◆고종의 아관망명

1894년 7월 청일전쟁이 일어났고 10월에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가 있었다.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이기고 동학농민혁명도 무자비하게 진압한 뒤 김홍집 친일괴뢰내각을 세워 이른바 ‘갑오경장’을 실시했다. 이듬해인 1895년에는 단발령이 내려졌고 명성왕후가 일제 군인과 깡패들에게 무참하게 시해되는 ‘을미왜변’이 일어났다. 이때까지의 서울 모습은 대체적으로 헤세-바르텍이 본 그대로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1896년 2월11일부터 상황이 바뀌었다. 고종은 그날 새벽 일본군에 사실상 포로로 억류됐던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했다. 우리가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고 배운 그날 고종의 거둥은 파천이 아니라 망명이었다. 임진왜란 때 선조나 이괄의 난 때 인조처럼 ▲난을 피해 ▲서울을 떠나 ▲지방으로 도망간 파천이 아니라 일제의 정치·군사적 압박으로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치외법권 지역인 아관으로 옮겨간 정치적 망명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고종은 아관망명 이후 친일괴뢰 내각을 무너뜨리고 친정(親政)을 강화했다. 1897년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등극한 뒤 근대화 개혁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때 개혁정책의 원칙이 된 것이 바로 구본신참(舊本新參)론이었다. 이는 “옛 규범을 근본으로 삼고 새로운 방식을 참작한다”는 뜻이다.

아주 오래전에 국사 공부를 한 40대 중반 이후 세대에게는 매우 생소하게 들릴지 모르는 구본신참론은 위정척사론, 동도서기론, 일도일기론 등으로 갈팡질팡하던 1870~1890년대 중반까지의 사상적 혼란을 통합시켜 실질적 개혁정책을 추진할 수 있도록 만든 독특한 ‘패치워크 사상’이었다. 서양 문물이 밀물처럼 밀려들고 일제가 한반도 침략야욕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던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우리의 ‘준비된 근대성과 선진성’의 잠재력에 서양문물을 참작, 우리의 몸에 맞춰 다듬고 깎고 우리 색깔로 물들여 받아들임으로써 급속한 발전의 터전을 마련한 것이다.

기본이 되는 우리의 우위는 공무원을 필기시험으로 뽑는 과거제도와 관료제도, 문관이 무관을 통제하는 문관우위 군사원칙, 향회와 민회 같은 전통적 지방자치제도, 쌀 농사법과 한지 제지술, 음력과 양력의 동시 사용 등을 꼽을 수 있다.

미군 1군단 55공병중대가 한강에 부교(浮橋) 설치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1950년 12월 9일. /사진=미국 국립문서보관청(NARA) 제공
◆패치워크 문화로 급성장
패치워크(Patchwork)는 원래 헝겊이나 가죽 조각들을 꿰매고 모아 붙여 짜깁기한 ‘쪽모이’ 식의 옷이나 보자기, 우산 텐트, 누비이불, 축구공 등 섬유, 가죽제품을 말한다. 오늘날은 모든 문화 분야에 뜻이 퍼져 기존의 여러 글이나 영화 따위를 편집해 완성품을 만드는 일이나 그 작품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혼과 재혼이 늘어나면서 ‘패치워크 가족’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패치워크는 딤채(백김치)와 고추가 융합되어 김치로 재탄생된 것처럼 내 것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다른 문명을 적극 받아들여 한발 앞서 나아가는 새 문명을 만들어 내는 것을 가리킨다.

구본신참론에 따른 대한제국의 변화는 눈부셨다. 대표적 사례로는 관립학교를 세워 사립학교 설립붐을 일으킨 것이다. 1896년부터 1909년까지 11월까지 세워진 학교는 2236개에 달했다. 이들 학교를 통해 광무개혁을 담당할 실무자들과 일제의 강제합병 이후 독립운동을 이끄는 ‘광무세대’가 육성됐다.

워싱턴DC를 모델로 삼은 서울 재생도 눈부셨다. 황토현(현 청계광장 인근)에서 흥인문(동대문)까지, 광통교에서 남대문까지 50척(약 15m) 넓이의 도로를 만들어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됐다. 1896년 10월2일에는 경운궁(덕수궁)과 인천 사이에 전화가 개통됐고 1898년 봄에는 서울에 전신, 전화, 전기가로등 등이 거리를 장식했다. 1899년 5월에는 도쿄보다 2년 빨리 전차가 개통됐다. 1897년 3월에 착공된 한강철교가 1900년 7월에 완공됐다. 이 한강철교는 6·25때 폭파된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는 아직도 사용 중이다.

각종 통계로도 뒷받침된다. 아관망명 이후부터 상공업회사가 매년 약 23개씩 신설돼 1904년에 205개의 근대적 회사가 운영됐다. 대한제국 정부 예산은 1897년 419만원에서 1905년 1911만원으로 4.6배나 증가했다. 무역총량도 1901년에 1800만엔을 웃돈 뒤 1910년 6000만엔에 이르렀다. 이에 힘입어 대한제국의 1인당 GDP는 1911년에 815달러로 일본(1356달러), 필리핀(913달러), 인도네시아(839달러)에 이어 아시아 4위에 올랐다(메디슨 작성 OECD 통계). 이런 경제력을 바탕으로 대한제국은 3만명에 이르는 신식군대를 양성해 자주국방 준비를 착실히 했다.

구본신참론을 바탕으로 눈부신 성과를 이룩한 대한제국은 일제의 불법적이고 강제적인 군사침략인 갑진왜란(1904년 2월6일)으로 급브레이크가 걸리고 말았다. 하지만 해방 후 급속한 근대화는 대한제국의 구본신참론에 바탕을 둔 근대화 개혁에 기초가 놓인 것이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47호(2018년 7월4~10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