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문화·역사·철학 등을 연구하는 인문학이 변방에서 주류 문화콘텐츠로 떠올랐다. 각종 강연에서 인문학은 인기만점 주제가 됐고 관련도서는 줄줄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갈증에 허덕이는 사람들, 그들의 갈등이 충돌하며 각박해진 세상…. 이런 세상에 지친 이들은 그동안 잊고 지냈던 자아와 실존을 찾아 나선다. 이런 분위기 속에 인문학은 우리 사회의 새로운 길잡이가 돼가는 분위기다. <머니S>는 창간 11주년을 맞아 우리 사회의 신선한 수맥을 뚫고 있는 인문학을 조명해봤다. 인문학이 왜 각광받는지, 그에 따른 부작용은 없는지 살펴봤다. 또 인문학을 실생활에서 즐기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어봤다. <편집자주>


[인문학이 주목 받는다] ① 왜 인문학인가


#. 40대 직장인 김판수씨는 최근 한 온라인 서점에서 인문학 서적을 열권가량 주문했다. 김씨는 올 초 우연한 기회로 인문학 강의를 접한 뒤 인문학에 빠져들었다. 매일 쳇바퀴 도는 듯한 삶, 남들만큼은 살아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돈을 벌고 적당한 여가를 삶의 전부로 여겼던 그는 “이제야 비로소 나를 돌아 보게 됐다”고 말한다. 김씨는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일상을 대해는 태도가 달라졌다”며 “최근엔 주변 사람에게 인문·교양서를 많이 선물하는데 반응이 좋다”고 흐뭇해했다.

대형서점 인문학 베스트셀러 코너/사진=김설아 기자
“어렵다”, “고리타분하다”, “재미없다”. 인문학에 따라 붙던 부정적인 꼬리표가 최근 몇년 새 떨어져 나갔다. 서점마다 인문학 서적이 범람하고 베스트셀러에 등극하는가 하면 기업에서는 각양각색 인문학 강의를 앞다퉈 개설한다.
인문학이란 무엇일까. 사전적 의미로 인문학은 언어·문화·역사·철학 등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인문학은 사람 중심의 학문으로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인문학은 확실히 과거와 달라졌다. 재밌고 쉬워졌다. 4차 산업혁명 시대, IT강국에 인문학 열풍이 분다. 


◆문턱 낮춘 인문학… 앞다퉈 강좌 늘려

인문학 열풍은 백화점 문화센터 강연프로그램도 바꿔버렸다. 요리와 에어로빅댄스, 필라테스 등 가벼운 취미에 머물렀던 프로그램이 인문학을 중심으로 빠르게 바뀌고 있는 것. 최근엔 워라밸 문화 확산과 근로시간 단축 등으로 삶과 여가를 중시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자기개발에 중점을 둔 인문학 강좌들이 더욱 각광받고 있다.

롯데백화점은 지난 3년 동안 인문학 강좌 수를 매년 20%씩 늘려왔다. 특히 올해는 지난해보다 전체 강좌를 150% 늘렸다. 이번 가을학기(9~11월)에선 영국 런던미술관 전문가이드를 초청한 ‘현대 미술 인사이트’ 강좌와 작가들이 직접 설명하는 고전 인문학 강좌가 눈길을 끈다.


현대백화점과 신세계백화점에서도 오후 5~6시 이후 시작하는 강좌 수를 지난해 여름학기보다 10~20% 늘렸다.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에서는 ‘가을, 인문학에 빠지다’라는 주제로 ▲내 마음속 클래식 보석상자 ▲꽃과 여인의 화가 천경자의 예술과 삶 ▲작품컬렉팅을 위한 아트마켓 따라잡기 등의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부산점에서도 ▲김종원의 서양미술사 산책 ▲권애숙의 수필교실 등 인문학기행 프로그램이 준비됐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3년 전부터 인문학 강좌에 대한 문의가 늘어나는 추세”라며 “고객 요구에 부응해 다양한 인문학 강좌를 개설했다”고 설명했다.

인문학 강좌에 대한 고객 반응이 뜨거워지자 백화점들은 스타 강연자를 내세우는 등 힘을 싣고 있다. 신세계백화점 인천점에서는 스타강사 김미경씨를 초빙해 ‘자존감 있는 여자로 사는 법’ 강연을 진행한다. 대구점에서는 시인 정호승씨가 들려주는 문학 토크콘서트 ‘내 인생의 소중한 가치 사랑’ 강연이 마련됐다.

출판가에서도 인문학 열풍을 비즈니스에 연계하는 흐름이 뚜렷하다. 퇴근 후 서점을 찾아 가볍게 인문학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교보문고에서는 인문학, 역사, 여행 등의 도서 판매량이 최근 2배 가까이 늘어났다.

온라인서점 예스24와 알라딘에서도 풍수, 역사 등 인문학 도서이 인기가 꾸준하다. 특히 유시민 작가의 신간 <역사의 역사>가 7월 종합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키기도 했다.

<역사의 역사>는 역사서와 역사가들의 관점을 파고들며 역사에 대해 탐문하는 도서다. 유시민 작가는 신간 출간 후 강연회 및 북토크를 진행하며 독자들과의 만남을 이어가는 중이다. 그의 저서 가치는 남다르다. 어려운 주제로 보이는 역사와 직접 대화하는 노하우를 전수하면서 독자의 지적 호기심을 채워준다는 평가다.

양만열 동방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인문학이란 머리로 이해하는 학문이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해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해하려는 학문”이라며 “주변에서 추진하는 인문학 강좌나 공연에 직접 참여해 마음으로 느끼면서 자연스럽게 내 삶의 일부로 녹아들도록 한다면 삶에 많은 도움을 얻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인문학이 마당으로 나온 이유는

서점 구석자리를 면치 못했던 인문학 서적들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등 인문학이 각광받게 된 이유는 뭘까. 모순으로 가득찬 사회에 대한 반작용이 인문학적 탐구욕을 촉발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돈'과 '실용'에 매몰된 현실에서 한걸음 비켜나 인간과 세계의 본질을 되찾겠다는 흐름으로 풀이할 수 있다.  


교보문고 관계자는 “한국 사회 구성원들이 낡은 가치로만 인식했던 윤리나 정의문제를 진지하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최병용 동국대 교수는 “지난 수십년간 실용·직업·기술만 강조하던 세상이었다. 그러나 기술적 실용성이 한계에 봉착하자 대안으로 인문학을 찾고 있다”며 “삶의 질을 추구할수록 인문학의 수요는 더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일각에선 인문학을 앞세운 '지식장사'의 범람을 우려한다. 실제로 최근 사물의 본질을 탐구하는 인문학적 접근보다 지적허영심 자극에 그치거나 흥미 위주의 단편지식을 나열한 강좌가 쏟아진다. 더욱이 일부 단체는 수익사업으로 인문학 프로그램을 개설하기도 한다.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기술과 인문학을 결합했더니 돈이 되더라”고 했다. 인문학 열풍을 어떤 잣대로 볼 것인지는 개개인의 선택에 달렸다.


☞ 본 기사는 <머니S> 추석합본호(제558·559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