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나무숲길 '규슈올레', 낯설지 않음을 걷다
일본의 최남단 철도역인 니시오야마(西大山馬尺). 원추형의 카이몬산이 보인다. /사진=박정웅 기자
열도의 봄은 완연하다. 너른 바다를 건넌 봄은 먼저 일본의 남쪽 규슈에 안착한다. 특히 태평양 외해를 마주한 가고시마현의 봄은 규슈의 어느 곳보다 빠르다.화사한 봄꽃이 화산석 검은 가고시마를 휘젓는다. 검은 게 땅뿐이랴. 시커먼 삼나무숲도 울창하다. 가고시마의 봄은 검은 캔버스에서 울긋불긋 핀다. 태평양으로 향하는 가고시마만, 활화산인 사쿠라지마의 왕벚은 섬의 이름값을 단단히 한다.
기리시마신궁의 거대한 삼나무. /사진=박정웅 기자
열도의 철도 최남단역인 니시오야마는 차분하게 봄을 맞는다. 이곳에서 가이몬산으로 향하는 올레길엔 유채를 비롯한 봄꽃이 지천이다. 봄꽃이 부채질한 들뜸을 가라앉힐 곳도 많다. 기리시마의 삼나무숲 올레를 느릿하게 걸음하거나 조그마한 천연 족욕탕에 발을 담그면 그만이다.삼나무는 일본의 특산종이다. 열도 어디에나 널린 게 삼나무다. 가고시마현에 펼쳐진 규슈올레서도 마찬가지다. 덩치 큰 삼나무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삼나무가 마을, 들판, 계곡을 가리지 않는데 규슈올레는 삼나무숲길이라 해도 괜찮다.
◆제주 올레길 같은 낯익은 풍경
기리시마·묘켄 코스의 종점인 시오히타시온천 료마공원으로 내려가는 비탈 구간. /사진=박정웅 기자
가고시마에는 제주올레와 함께 개발한 코스가 여럿이다. 기리시마·묘켄(묘겐), 이부스키·카이몬(가이몬), 이즈미 코스 등 3곳이다.기리시마·묘켄 코스는 일본 100대 명산 중 하나인 기리시마산의 삼나무 속살을 파고든다. 이 길에는 스토리가 있다. 일본 근대화의 초석을 다졌다는 사카모토 료마(1836~1867)와 잇댄 얘기로 그의 부인 오료와 함께 거닌 신혼여행길이다. 료마는 이곳을 걸으면서 스스로 ‘허니문’이라는 영어단어를 썼다고 전한다.
기리시마·묘켄 코스의 시작점인 현수교. 오른쪽엔 올레길을 알리는 표식이 있다. /사진=박정웅 기자
코스의 시작점인 묘켄 온천은 깊은 산과 아모리강 골짜기에 자리한 유명한 온천휴양지다. 특히 탕치(湯治·온천으로 치료하는 요법)로 이름이 높았다. 지금은 유명세가 빛바랬지만 방을 빌려 숙식을 해가며 수개월 동안 온천욕에 집중한 명소였다. 온천수의 성질이나 그 효험을 굳이 따질 필요는 없겠다. 삼나무숲과 아모리강이 내뿜는 피톤치드와 음이온만 들이켜도 갖은 병이 사라질 판이어서다.기리시마·묘켄 코스는 묘켄의 아모리강 현수교에서 시작한다. 현수교의 녹슨 아치가 정겹다. 온천가를 흐르는 아모리강의 풍광은 고즈넉하다. 울창한 삼림이 건네는 청량감이 더해져 한참을 머물러도 좋다. 코스의 종점은 료마공원이다. 무료 족욕탕에서 걷기여행의 피로와 삶의 먼지를 덜어내는 재미가 쏠쏠하다.
료마공원의 사카모토 료마와 그의 부인 오료의 조형물. /사진=박정웅 기자
기리시마·묘켄 코스는 묘켄온천가에서 와케유(1.0㎞)-이누카이노타키폭포(2.0㎞)-산길·강길(5.0㎞)-와케신사(7.0㎞)-료마의 산책길-시오히타시온천 료마공원까지 총 11㎞ 구간이다.이부스키·카이몬 코스는 일본의 최남단 철도역인 니시오야마가 시작점이다. 니시오야마 역사는 단출하다. 작은 역이지만 찾는 이가 많다. 최남단역의 상징물을 두고 카메라 셔터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묘켄 온천시설과 아모리강. /사진=박정웅 기자
원추형의 카이몬산을 배경으로 완행열차가 객차 한두량만 딸랑 달고 달리는 풍경은 마치 그림엽서 같다. 올레꾼의 방앗간 격인 역전 노포에서 차 한잔을 마셔도 좋다. 선로를 건너 너른 들판으로 향하면 그 끝이 바로 태평양이다. 카이몬산은 손에 닿을 듯 늘 가까운 거리에 있다. 코스가 평탄해 가족단위 여행객이 걷기에 좋다.이부스키·카이몬 코스는 니시오야마역에서 소나무숲(3.2㎞)-레저센터 카이몬(5.1㎞)-가와지리해안(5.6㎞)-가와지리어항(6.1㎞)-카이몬산록허브원(7.4㎞)-히가시가이몬역(9.5㎞)-가미이케(11㎞)-히라키키신사(12.6㎞)-카이몬역까지 12.9㎞ 구간이다.
묘켄 기리시마산의 삼나무숲. /사진=박정웅 기자
가고시마를 걸음하면 제주의 올레길처럼 낯익은 풍경을 만난다. 같은 이정표를 쓰는 것도 그렇지만 지역 농산물 무인판매소 또한 닮은 것. 작은 오두막집에 들어서면 100엔(약 1000원) 상당의 특산물이 눈에 띈다. 1000원짜리 귤 한봉지에 갈증과 배고픔을 해소한 제주올레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공정여행의 가치가 달콤하다.◆가미카제와 관음보살, 그리고 세계유산
지란평화공원에 전시된 태평양전쟁 당시 피탄 투성이의 전투기. /사진=박정웅 기자
지란평화공원의 가미카제 조각상과 전투기. /사진=박정웅 기자
가고시마에는 짚어봐야 할 질곡도 있다. 미나미규슈의 지란평화공원은 태평양전쟁 당시 가미카제(자살특공대)가 출격한 곳이다. 이곳에는 1941년 일본 육군 비행학교의 지란분교가 자리했다. 당시 지란기지는 일본의 심장인 본섬(혼슈)을 방어하는 개념이었다.패전 막바지, 수많은 젊은이가 검은 땅을 박차고 태평양으로 향했다. 본토를 방어하는 최남단 기지로 바다에서 희생된 이만 1036명이었다. 이 중 11명의 조선인이 끼어 있었다. 후루하타 야스오 감독의 영화 <호타루>(The Firefly)의 김선재의 비화가 지란평화공원에 숨어 있다.
지란평화공원 기념관에 전시된 가미카제 유서. 일본은 이러한 유서(혹은 출전결의문)를 중심으로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했다. /사진=박정웅 기자
지란평화공원에 세워진 관음보살상. /사진=박정웅 기자
지란평화공원에는 출격하는 가미카제와 그의 아들을 지켜보는 어머니 조각상이 있다. 또 세상 모든 어머니의 마음으로 관음보살상이 세워져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모든 이를 구제하고 제도하는 관음보살이 ‘특공평화관음상’(特功平和觀音像)으로 새겨졌다는 것. 희생자 진혼에는 이견이 없겠으나 뒷맛은 개운치 않다.일본은 전범시설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는 작업을 줄기차게 추진했다. 유네스코에 내는 막대한 지원금을 지렛대로 삼아왔음은 익히 알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조선인의 강제노역장을 근대산업시설로 탈바꿈해 등재하려 한 군함도(軍艦島)다.
지란평화공원의 후루하타 야스오 감독의 영화 '호타루'(The Firefly) 기념물. 호타루는 경북 안동 출신인 김선재의 비극을 다룬다. /사진=박정웅 기자
전범의 역사를 교묘하게 지우려는 행태는 지란평화공원을 비껴가지 않았다. 2014년 지란공원의 가미카제의 유서 등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묶으려 한 것. 지란평화공원의 관음보살이 평화와 화해와는 거리가 먼 다른 조형물로 여기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가고시마 여행팁
인천공항에서 가고시마공항까지는 1시간30분이 걸린다. 가고시마공항 주변에는 렌터카업체가 많다. 대부분 공항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다. 대여비는 저렴한 편. 다만 우리에겐 ‘우핸들’ 환경이 낯설기 때문에 운행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따라서 길동무가 있으면 안전여행에 도움이 된다.
태평양 연안의 이부스키시 타마테바코온천과 수증기. 해벽 아래엔 천연 모래찜질장이 있다. /사진=박정웅 기자
대중교통으로도 가고시마여행을 완성할 수 있다. 가고시마현의 각급 지자체가 운영하는 노선버스나 관광버스가 있다. 기리시마·묘켄 올레의 경우 가고시마공항-하야토역을 오가는 묘켄 노선버스를 찾아보자. 지역 명소를 잇는 버스 일일 승차권도 있다. 단체일 경우에는 관광택시(점보택시)가 편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가고시마현 홈페이지 등을 참조하자.☞ 본 기사는 <머니S> 제589호(2019년 4월23~29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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