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이기림 기자 = 글은 언제나 '지면'을 필요로 한다. 지면이 없다면 아무리 대단한 글을 쓴다고 해도 결국 나만의 메모, 일기, 낙서가 될 것이다. 문예지는 그런 점에서 작가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 독자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가 실리는 플랫폼으로 사랑을 받아왔다.
문제는 문학시장, 잡지시장의 축소였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2018 잡지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잡지산업 전체 매출은 2014년 1조3754억원에서 2017년 1조354억원으로 24.7% 줄었다. 책을 읽는 사람들도 계속해서 줄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19년 국민 독서실태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성인의 종이책 독서율은 52.1%, 독서량은 6.1권에 불과했다. 2017년 대비 각각 7.8%포인트, 2.2권 줄어든 수치다.
문예지도 당연히 타격을 입었다. 게다가 이른바 '문단권력'이라고 불리는 출판사와 기성작가 등의 힘은 문예지의 가치를 떨어트렸다. 그렇게 2015년 문예지 쇄신이 시작됐다. 창비 '문학3', 민음사 '릿터', 은행나무 '악스트' 등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 시기 이후 수많은 독립문예지들도 탄생했다.
그로부터 5년이 흐른 2020년 10월, 또다른 대형 출판사의 도전이 시작됐다. 다산북스가 계간(1, 4, 7, 10월 발행) 내러티브 매거진 '에픽'(Epiic)을 발행한 것이다. 다른 출판사보다 한참 늦은 도전이지만, 그만큼 신선하다. 이들은 다른 문예지와 차별성을 둔, 픽션과 논픽션을 아우르는 신개념 서사 중심 문학잡지를 표방한다.
14일 서울 종로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만난 '에픽' 편집위원 문지혁 소설가는 "최근 많은 문예지들이 사라졌고, 새로운 콘셉트를 가진 문예지가 생겨났다"며 "각 문예지마다 개성과 특징이 있지만, 서사를 강조하는 문예지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에픽'이 탄생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편집위원인 차경희 독립서점 고요서사 대표는 "2015년부터 서점을 운영하다보니 독자이자 중계자의 입장에서 문예지의 역사를 봐왔다"며 "전통 문예지는 여전히 기존 문학의 장에서 수용할 수 있는 장르나 주제의 한계가 있고, 독립문예지는 자금의 한계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에픽'은 전통 문예지 형태를 띄지만, 다양한 필자와 장르, 주제를 포섭하기 위한 기획을 해 기존 문예지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다"고 했다.
그렇게 문 소설가와 차 대표 이외에도 '에픽'를 처음 기획한 정지향 소설가와 임현 소설가 등 4명이 편집위원으로 모였다. 독립문예지로 시작할 수도 있었지만, 새로운 한국문학을 담고자 한 출판사 다산북스가 이들과 힘을 모으기로 했다.
수많은 문예지가 있는 상황에서 '에픽'의 차별점은 무엇일까. 임현 소설가는 "논픽션을 기존의 비문학이 아닌, 문학 안에서 다뤄보고자 했다"며 "픽션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소재적인 측면 등에서 논픽션 서사가 확장, 그리고 세밀한 접근을 가능하게 할 것으로 보고 다양한 작가군과 독자층을 개발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문 소설가는 "경계가 없거나 낮은, 모든 텍스트가 문학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라며 "영미권에서는 많이 쓰이는, 저널리즘에 바탕을 둔 르포르타주가 아니라 내러티브와 스토리텔링이 부각되는 것을 의미하는 '크리에이티브 논픽션'을 선보이려 한다"고 말했다.
정지향 소설가는 "문예지 에픽(Epiic)은 'i'를 덧붙인 고유명사로, 한 개인과 다른 개인, 한 세계와 다른 세계가 만났을 때 비로소 시작되는 이야기를 상징한다"며 "비교적 익숙하게 읽은 픽션과, 크리에이티브 논픽션이란 장르가 만나서 새롭게 생긴 지점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에픽' 창간호 제호에는 프랑스 소설가 드니로의 소설 제목인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가 붙었다. 이 소설은 대화체로 진행되는데, 제목의 모순에 허구로 쓰인 이야기가 소설의 정의가 맞는지, 소설과 현실의 경계는 어디에 있는지 등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잡지의 콘셉트를 설명하기에 적절하다는 판단에 제호로 결정됐다.
임현 소설가는 "어떻게 하면 논픽션 서사가 문학이라는 걸 인식시킬 수 있을까 고민해왔다"며 "독자들이 함께 참여하고 읽을 때 가능할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독자들의 '나'의 이야기, 내가 살아온 이야기가 결국 '에픽'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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