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김윤경 기자 = 한 해가 끝나고 새해가 시작되면 보통의 사람이라면 자성(自省)하게 마련이다. 개인적 곡절이 없는 삶이야 있겠냐마는 2020년엔 공통으로 받은 고통의 강도도 무척 셌다. 그 속에서 불평등의 그늘은 더 짙게 보이고 희망의 빛은 당장이라도 꺼질 듯 위태롭게 느꼈던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2020년에서 2021년으로 넘어오면서 차분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계획하기보단 남탓, 세상탓, 시절탓을 하는 사나운 마음으로 먼저 움직이기 쉬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이타(理他)란 단어의 밀도는 더 옹골차게 되지 않았을까. 쉽게 실천하기 어려워졌단 점에서. 사실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이타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해방둥이 수녀시인, 암투병 중에도 남 먼저 '이타' 실천 노력
시인이자 수도자인 이해인 수녀가 '코로나 시대'를 건너고 있는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도 바로 그것이다. 결핍이 이기적인 예민함을 불러오더라도 그것을 넘어 이타적 예민함으로 함께 하자고. 재난 앞에 겸손해지고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칠 필요가 있다고. 그렇다면 재난도 성숙의 도약대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해방둥이니까 이미 70대 후반이고 암 환자이다 보니 여기저기 아프고, 여기에 코로나 사태까지 맞았으니 아무리 수도자라도 마음의 평화가 깨지고 겁도 나곤 했다는 이해인 수녀. 그래도 '명랑한 투병'과 겸손한 수도로 이타적 예민함을 실천하려 애쓴다. 아픈 사람이 찡그리는 건 당연하겠지만 그걸 보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 어두워지는 것이 미안하다며, 이런 시절일수록 곁을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자신을 긍정하며 사랑해야 한다고. 그렇게 되면 '나 하나쯤이야'란 생각을 '나 하나만이라도'란 능동적인 사고 방식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라고 공동체 안에 있는 모두에게 조금 더 이타의 실천을 바랐다.
부산 성베네딕토 수녀회 소속으로, 입회한 이후 여태껏 부산에 살고 있는 이해인 수녀를 아쉽지만 이메일을 통해 만났다. 생각보다 더 솔직했고 덜 엄격했다.
다음은 이해인 수녀와의 일문일답. 인터뷰지도 그렇게 작성하고 답변도 그렇게 받았지만 조금 더 '대화체'로 다정함을 살려 써 본다.
-이번에 평소에 갖고 계신 생각을 인터뷰 형식으로 풀어낸 책 '이해인의 말' 잘 읽었습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들까지 많이 들려주셔서 인간적으로 가까워지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암세포야, 할 일이 많으니 기다려줘"라고 스스로 대화하신단 말을 보고 다소 안심도 했습니다.
▶ 솔직히 말씀드리면 요즘 코로나 시대를 살면서 자주 마음의 평화가 깨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나이로도 70대 후반을 사는 암환자이다 보니 아무래도 아픈 곳이 많이 생겨나 슬그머니 겁이 날 적도 많지만 제가 일관해 온 '명랑 투병'의 태도를 잃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합니다.
-코로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고통 속에서도 배울 것이 분명히 있고, 인생엔 기쁨과 슬픔이 모두 있다는 말씀을 하시기도 했지만 당장의 어려움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그 뜻을 다 헤아리기 어려운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은 어차피 함께 겪어내야 하는 공동체적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좀 더 자기 밖으로 빠져나와 함께 지혜를 모아야 할 것 같습니다. 살아가면서 가졌던 '나 하나쯤이야'하는 게으르고 안일한 사고방식을 '나 하나만이라도'라는 능동적인 사고방식으로 바꿔갖고 그래도 고통 속에 숨어있는 희망을 함께 찾아야겠지요. 어둠 속에서 별을 찾듯이. 그러려면 일상의 언어 생활에 있어서도 한탄과 자조와 불평에 차 있는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표현을 삼가면서 '모든 것은 다 지나갈 거야' '잘 견뎌내야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길은 안 보이니 누구에게 어떻게 도움을 청해볼까' 등등 죽음과 절망의 상태를 생명과 희망으로 바꾸는 노력을 열심히 해 나가는 '겸손한 순례자'가 될 수 있길 기도하고 싶습니다.
◇비극은 한때…수십년전 '죽고 싶다' 편지 보낸 이들, 지금 멋진 삶
이해인 수녀는 겸손이란 단어를 주변 여기저기에 써 놓았다고 한다. 주어온 나무토막에도 겸손하자고 쓰고 그걸 들여다볼 때마다 '오늘은 절대 화낼 일이 있어도 화내지 말고 겸손해야지'라고 다짐한다고 한다.
-수도 생활을 50년 하고 난 심정이 어떠냐고 묻는다면 '담백한 물빛의 평화를 느낀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담백한 물빛의 평화란 어떤 것일까요.
▶ 담백한 물빛의 평화란 저뿐만 아니라 반 세기 동안 수도생활을 한 사람이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일종의 덕목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모든 것에 온전히 달관한 경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인생의 사계절에 일어나는 일, 경험하는 모든 일들을 좀 더 객관화할 수 있는 담담함,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함부로 차별하지 않고 치우치지 않고 수용할 수 있는 여유로움, 그리고 모든 안팎의 욕심(좋은 욕심이라도)에서 좀 더 자유로울 수 있는 수수하고 순수한 물빛의 단순함과 평온함을 말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것이 딱 맞는 정답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군요.
이해인 수녀는 암에 걸리니까 자신이 쓴 '백일홍 편지'란 시가 더 좋아졌다고 했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모든 만남은 생각보다 짧다
영원히 살 것처럼
욕심 부릴 이유는 하나도 없다
지금부터 백일만 산다고 생각하면
삶이 조금은
지혜로워지지 않을까
...(중략)
살아 있는 동안은
많이 웃고
행복해지라는 말도
늘 잊지 않으면서
- 그동안의 인생을 표현하시는 말로 '흰 구름 러브레터'란 표현도 쓰셨던데 구체적인 의미도 궁금합니다.
이해인 수녀는 자신이 직접 이렇게 묘비명을 썼다. "그녀는 하느님과 이웃과 자연을 사랑하며 살다 간 시인 수녀였다.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흰구름 천사로 살고 싶어했다. 이름 뜻대로 하나의 흰 구름 러브레터로 살다 갔다"라고.
▶ '흰 구름'이란 말은 헤르만 헤세의 '흰 구름'이란 시를 읽고 더 좋아하게 되었고 저의 수도명이 클라우디아(Claudia)라, 구름이란 뜻의 단어 클라우드(Cloud)와도 연결이 된다고 생각해 제가 운영하는 '해인글방' 옆 부속실의 별칭도 '흰구름 카페'입니다. '흰구름 수녀' '흰구름 편지' 등 이 단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엔 자신을 많이 다그치며 사셨다고 하셨는데 그래서 아쉬운 점은 없으셨는지요. 지금의 젊은이들은 성장의 시대가 아니라 '정체의 시대'를 살다보니 자신을 더 가혹하게 다그치며 사는 것도 같아 아쉬운데요, 인생의 선배로서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 제가 책에서 말한 젊은 날 다그침이란 영적으로 진보하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워 지나치게 마음앓이를 하고 필요 이상으로 냉대한 부분을 언급했던 것 같구요, 자신의 정체성과 일자리 문제 등으로 고민이 많은 젊은이들이 스스로를 치열하게 다그치는 모습은 오히려 필요한 부분이라 여겨지기도 합니다.
다만 어려운 시절을 살고 모든 일이 뜻대로 안 풀린다고 해서 너무 비관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이 상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탐구하면서 자기자신과 삶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연습을 먼저 하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저의 글방 창고엔 1980년대 후반 많은 젊은이들이 보내 온 편지들이 있는데 자신이 처한 역경 속에서도 선하고 진실한 삶을 향해 전진하고 싶은 갈망이 어찌나 강렬하게 표출돼 있는지 감동을 받곤 합니다. 한때 죽고 싶다던 이들이 지금은 어딘가에서 유능한 교수나 멋진 예술가가 되어있고 출판사의 편집주간이 되어 있는 모습을 봅니다. 남을 탓하기 전에 자신부터 먼저 살펴보며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젊은이들이 많을수록 좋은 나라가 될 것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수도 생활을 하시고 이타심을 늘 고심하시지만 평범한 일상 속의 우리들은 점점 더 빡빡해지고 있습니다. 이타심은커녕 이기적인 예민함을 더욱 키우고 있는 것 같은데요, 이타심과 배려심을 회복하는 사회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조금이라도 더 이타적인 삶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은 우선 내가 남에게 기대하는 것을 내가 먼저 실천하려는 의지와 용기를 지녀보는 데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이의 잘못을 속단하고 싶을 때 일단 판단을 보류하고 나 자신의 부족함부터 들여다 보려는 겸손함을 지니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매일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행동을 성찰하는 (이기적인 나에서 이타심으로 건너가기 위한)시간일기를 쓰거나 단상들을 수첩에 적어두는 습관을 들이기,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좋은 책이나 글을 읽고 이를 발췌해 친지들과 나누는 일종의 '좋은 말 나눔' 취미를 길들이기 등을 해보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어른 부재의 시대, 이 땅의 수많은 '코로나 의료진'이 그 역할
- 우리는 이 혼란한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 지 좌표를 찾는데 도움을 줄 '어른'들을 많이 잃었습니다. 이번에 수녀님께 인터뷰를 청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어른'들이 너무 없어지고 있다는 것이 아쉽습니다. 물론 인간이 인간을 보고 따라가는 삶에는 많은 한계가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올바르고 공정한 것을 인생의 지혜로 알려주실 분들이 없어진다는 것은 매우 큰 아쉬움을 줍니다.
▶ 어린시절 슈바이처나 나이팅게일의 전기, 그리고 아유슈비츠 감옥에서 생판 모르는 이웃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막시밀리아노 콜베(Maximilian Maty Kolbe) 신부님의 전기를 읽고 매우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최근에 마더 데레사, 김수환 추기경님, 이태석 신부님의 영상들을 보고, 또 법정스님과 박완서, 최인호 작가들의 사진과 글을 보니 새삼 그리움이 별처럼 떠올라 눈물이 흐르기도 했구요.
부산에 살다 보니 (한국의 슈바이처로 칭했던) 장기려 박사님의 생애도 새삼 관심을 갖게 되더라구요. 우리의 몸이 지상에서 사라져도 영원히 남는 것은 인류를 위해 전적으로 헌신한 이들의 사랑이라 여겨집니다.
꼭 이름난 성인이라 순교자가 아니더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이 땅에서 숨은 위인으로 빛을 발하는 덕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코로나 위기에서 우리를 구하기 위해 밤낮으로 노심초사하는 의료진도 그 중의 하나가 아닐런지요. 우리가 따르고 존경하는 분들이 세상을 따난 그 자리를 누군가 채워주길 기대하기 전에 바로 우리 자신이 선하고 아름다운 별이 되겠다는 곧은 의지를 지니고 살아가는 숙제를 사명감으로 안고있으면 좋겠습니다. 옛 선인과 학자들이 늘상 고전과 위인전을 일상의 삶에서도 끌어안고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그런 정신을 본받아 공부도 하되 실천으로도 자신의 삶을 통해 확대하는 그런 노력을 더 구체적으로 할 수 있길 기대해 봅니다.
-책에선 김수환 추기경의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라"란 말씀을 강조해주셨습니다. 두고두고 새겨볼 말씀인 것 같습니다. 우리의 평범한 생활 속에서 그 말씀은 어떤 방식으로 실천으로 옮길 수 있을까요.
▶ 어쩌면 일반적으론 실천하기 어려운 덕목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것은 살아가면서 누구를 함부로 차별하지 않는 사랑, 모든 이를 다 내 형제, 자매, 친척으로 존중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인류애 같은 것이 아닐런지요. 이렇게 되기 위해선 매일 만나는 내 가족, 친지, 이웃부터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에 치우치지 않고 공평하게 대하는 노력을 해야 되겠지요. 이토록 조그만 나라에서 학연 지연 정당 등... 유독 네편 내편 편가르기가 갈수록 심한 것도 언젠가는 꼭 극복되어야할 비극이라 여겨집니다.
-2020년을 살아 오시는데 목표가 되었던 '피정 결심서'에는 "내게 오는 모든 아픔을 다른 사람한테 부담주지 않고 긍정적으로 수용하겠다"라 썼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 없는 힘도 내어 '명랑 터프걸'이 되기 위해 힘썼다는 말에 감동했습니다. 명랑함을 끝까지 유지하며 타인에게 친절할 수 있는 힘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지요.
▶ 글쎄요, 굳이 설명을 하자면 어린시절부터 물려받은 신앙심에서 비롯되기도 했을 것이구요, 제가 아프기 전에 다른 이들이 아플 때 지녔던 태도를 관찰해 본 결과에서 깨달은 것이 밝은 표정과 긍정적인 태도, 따뜻한 말씨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실제 상황에 처했을 적에 미리 계획한대로 실천하려고 나름대로 꾸준히 최선을 다해왔던 성실함에 근거하지 않을까요. 또 주위 사람들의 이런 저런 충고를 적극 수용하고 배우려는 자세 때문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2021년이라는 또 새로운 해를 맞은, 그리고 여전히 알 수 없는 미래에 불안해하고 견디는 삶에 너무도 힘겨워 하는 현재의 '우리들'에게 해주시고 싶은 당부의 말씀이 있을까요.
▶ 새해는 하얀 소의 해라고 들었습니다. 우리 모두 소처럼 부지런하게 Δ내가 먼저 웃고 작은 일에도 고마워하는 밝은 마음 Δ내가 바라는 것을 남에게 먼저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 Δ주어진 시간들에 정성을 다하는 성실한 마음 Δ실수하고 넘어져도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어있는 겸손한 마음과 함께 어깨동무하고 새롭게 길을 가는 새로운 우리가 될 수 있길 바랍니다.
-다음 작품집 계획은 어떠신지요.
▶ 그림책 시리즈가 나오고 있는 중입니다. 이미 발간된 '누구라도 문구점' '어린이의 마음을 위한 기도' '감사하면 할수록'에 이어서 '수녀새' '밭이야기' '우리동네 이야기' '느티나무가 속삭인 말' 등이 나옵니다. 날개 돋히듯 팔리는 책이 아니라도 그림이 아름다워서 좋습니다. 종종 어린이들과 편지로 소통하는 기쁨이 있어 이 시리즈들을 좋아합니다. 동심은 사람을 언제나 선하고 기쁘게 살고 싶게 만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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