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시대 책읽기]로버트 새폴스키의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
"자유의지는 착각"이라는 새폴스키의 주장
인간 행동 뒤의 상처와 조건을 돌아보게 하지만
세계가 결정돼 있다면 인간 책임은 없는 것인가
자기성찰이 인간과 알고리즘을 가르는 경계일 것
안기석 동행미디어 시대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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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결정되어 있고 자유의지는 착각이다."
신경생물학자 로버트 새폴스키의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는 이 한 문장으로 독자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는 인간의 선택이 사실은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의 행동은 유전자, 호르몬, 뇌세포의 발화, 어린 시절의 경험, 가정환경, 사회 구조, 진화의 역사까지 얽혀 만들어진 결과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스스로 운전대를 잡고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조건이 핸들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 말은 꽤 설득력 있다. 누군가 폭력적인 행동을 했다면, 그 배후에는 그날의 스트레스, 낮은 혈당, 과거의 학대, 가난, 뇌 구조, 사회적 박탈이 함께 작동했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저 사람은 그냥 나쁜 사람"이라고 쉽게 단죄해버린다는 것이다.
새폴스키의 주장이 매력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우리에게 분노 대신 이해를, 응징 대신 치료를, 복수 대신 연민을 제안한다. 범죄자를 악마로 보기보다 고장난 시스템으로 보고, 처벌만이 아니라 교정과 회복의 관점에서 접근하자는 것이다. 자율주행차가 사고를 냈다고 자동차를 감옥에 보내지 않듯, 인간의 반사회적 행동도 그 배후 조건을 고쳐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까지는 귀담아들을 만하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새폴스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므로 인간에게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말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의 통찰은 위험한 '생물학적 결정론'으로 미끄러진다.
새폴스키의 생물학적 결정론은 AI시대와 묘하게 닮아 있다. 오늘날 알고리즘은 우리의 소비, 정치 성향, 건강 위험, 대출 가능성, 범죄 가능성까지 예측하려 든다. 알고리즘의 메시지는 "당신은 당신이 살아온 데이터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새폴스키의 주장도 비슷하다. "당신은 당신을 만든 생물학적 조건의 결과다." 둘 다 인간을 하나의 출력값으로 본다. 입력이 있었고, 계산이 있었고, 행동이라는 결과가 나왔다는 식이다. 그래서 인간의 뇌와 AI를 비교해서 인간도 알고리즘이고, AI도 알고리즘이라는 '알고리즘 환원주의'에 귀착하고 만다.
하지만 이 비교에는 결정적인 빈틈이 있다. AI는 자신이 알고리즘이라는 사실을 괴로워하지 않는다. 챗봇은 자신이 편향된 데이터로 훈련되었다는 점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그것을 넘어서려는 불편함도 느끼지 않는다. 인간은 다르다. 우리는 "내가 왜 이렇게 반응했지?"라고 스스로 묻는다. "내가 자란 환경 때문에 이런 편견을 갖게 된 것은 아닐까?"하고 의심한다. 그리고 때로는 그 편견과 싸운다. 이것이 자기성찰이다. 인간은 자극에 대해 단순히 반응하는 존재가 아니다. 자신의 반응을 바라보고, 평가하고, 고치려는 존재다. 바로 여기에 AI와 인간의 결정적 차이가 있다.
물론 새폴스키는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그 자기성찰도 결국 뇌의 작용이다. 전두엽이 그렇게 발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물론 사랑도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의 작용을 동반한다. 논리적 추론도 뇌세포의 발화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환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랑을 생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사랑의 의미가 호르몬이나 물질로 환원될 수는 없다. 자기성찰이나 논리적 추론이 뇌에서 일어난다고 해서 그 가치나 의미가 뇌의 작용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새폴스키의 오류는 인간의 생각이나 행위를 생물학적 결정론으로 설명하다가 인간의 정체성 자체를 지워버리는 데 있다. 인간의 행동이 조건에 의해 깊이 영향을 받는다는 말은 옳지만 그것이 곧 인간에게 선택할 자유나 책임도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 사람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이 말은 자비와 관용의 언어가 될 수도 있다. 가난, 학대, 질병, 차별이 한 사람의 삶을 깊이 망가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 신중하게 판단하고, 더 따뜻하게 대해야 한다. 하지만 이 말은 잘못 사용될 수 있는 위험도 있다. 독재자가 "나는 그렇게 자랐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부패한 권력자가 "내 욕망도 뇌가 만든 결과일 뿐"이라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반박할 것인가. 성범죄자가 "내 행동은 호르몬과 환경의 산물이었다"고 말한다면 피해자는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 있는가.
인간이 저지른 일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완전히 지워버리면, 그 빈 자리는 반드시 다른 무언가가 차지한다. 역사적으로 그 자리는 국가, 이념, 자본, 시스템이 차지해왔다. 그리고 AI시대에는 알고리즘이 그 자리를 차지할 가능성이 크다. 이때 결정론은 위험한 이데올로기가 된다.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사람을 분류하고 고정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인가. 그렇지는 않다. 우리는 부모를 선택하지 못했고, 태어난 시대와 나라를 선택하지 못했다. 유전적 기질, 어린 시절의 상처, 사회적 조건도 마음대로 고를 수 없었다. 인간은 분명 조건 속에 던져진 존재다. 그러나 조건의 시공간 속에 있다는 것과 조건의 족쇄에 완전히 묶여 있다는 것은 다르다. 어차피 살아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조건의 크고 작은 바다 속에서 헤엄쳐 나가는 것이다. 조건의 조류에 무작정 밀려다니거나 가라앉는 물건은 아닌 것이다.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노예였다. 외적 조건만 보면 그는 거의 자유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깨달았다. 일어난 일을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어도, 그 일에 대한 자신의 태도는 훈련할 수 있다는 것을. 이것이 스토아 철학의 핵심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저자 빅터 프랭클도 비슷한 증언을 남겼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라는 극한의 조건 속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마지막 빵을 타인에게 나누어주었다. 모든 조건이 인간을 이기적으로 몰아붙이는 순간에도, 누군가는 다르게 응답했다. 그렇다. 자유는 아무 조건도 없는 공중에서 생겨나는 마술이 아니다. 자유는 조건을 인식하고, 그 조건과 씨름하는 능력이다. 충동대로 반응하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서서 "나는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를 묻는 능력이다. 현대 신경과학도 이 가능성을 완전히 닫지 않는다. 오히려 신경가소성은 인간의 뇌가 경험과 학습, 훈련, 명상, 반복된 실천을 통해 변화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새폴스키는 "그 훈련을 하게 된 것도 결정된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기성찰적 실천을 통해 실제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내 습관을 관찰하고, 그것을 바꾸려 노력하고, 그 노력이 뇌의 구조와 행동 패턴을 다시 바꾼다면, 인간은 단순한 기계적 출력값이 아니다. AI는 정보를 처리한다. 그러나 인간은 의미를 해석한다. AI는 패턴을 계산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삶 속에서 그 패턴이 무엇을 뜻하는지 묻는다. 이 차이를 무시하면 인간은 너무 쉽게 '탄소에 기반한 알고리즘 기계'로 축소된다.
새폴스키는 생물학적 결정론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착각으로 치부하고 도덕적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그의 주장은 역설적으로 겸손의 중요성을 가르친다. 인간은 생각보다 훨씬 많이 조건에 묶여 있으므로 타인을 너무 쉽게 정죄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실패한 사람, 무너진 사람, 잘못한 사람을 볼 때 그 배후의 상처와 구조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윤리적 강조는 생물학적 결정론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의 자기성찰 능력과 타인에 대한 배려 의식을 믿는 것이다.
세계가 어느 정도 결정되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 결정의 구조를 인식하고 질문하는 존재다. 조건의 산물이면서도 조건과 씨름하는 존재다. 이것이 인간을 알고리즘보다 더 복잡하고, 더 불편하며, 더 존엄하게 만든다. 생물학적 결정론은 우리에게 겸손과 관용의 필요성을 가르치지만 자기성찰 능력은 우리에게 책임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이 두 가지를 균형있게 붙들 때, 우리는 새폴스키의 통찰을 살리면서도 그의 생물학적 결정론이 지닌 위험을 넘어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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