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치 덱(사업계획서)에 '넥스트 팔란티어'라고 적힌 팀은 일단 거릅니다."

국내 한 벤처캐피털(VC) 심사역이 털어놓은 이 냉소적인 고백은 2026년 현재 팔란티어가 도달한 '넘볼 수 없는 위상'과 이를 흉내 내기에 급급한 '한국의 초라한 민낯'을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글로벌 VC 앤드리슨 호로위츠(별칭: a16z)는 스타트업의 '팔란티어화(Palantirization)'가 거스를 수 없는 세계적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팔란티어의 성공 이후 많은 스타트업이 '일하는 방식의 혁신(FDE)'을 적극 도입하고, '재산업화와 국방 혁신'이라는 난제 해결에 뛰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한국은 출발선에조차 서지 못하고 있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넥스트 팔란티어'란 비현실적 슬로건을 내거는 순간 '걸러지는' 이유다.
실리콘밸리의 새 표준: SaaS가 가고 'FDE'가 왔다

팔란티어의 성공을 본 실리콘벨리는 FDE 채용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FDE라는 직군을 가진 회사는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꾸준히 신규 채용이 급증하면서(오른쪽 그래프) 지난해 9월 기준으로는 전체 회사의 1.2%가 FDE라는 직군을 가지게 됐다.(왼쪽) /자료=a16z, 그래픽=강지호 기자
'제2의 팔란티어'의 첫 번째 조건은 '전방 배치 엔지니어(FDE, Forward Deployed Engineer)'다. 과거 B2B 시장을 주도했던 SaaS(서비스형 소프트웨어) 모델이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파는 수동적 구독 형태인 방식인 반면 팔란티어 모델은 엔지니어(FDE)가 고객의 현장에 직접 침투하는 '하이터치(High-Touch)' 방식을 채택한다.
이는 고객의 가장 복잡한 문제를 현장에서 해결하고, 그 경험을 다시 제품 고도화(R&D)로 연결하는 순환 전략이다. 이러한 '현장 중심 문화' 덕분에 팔란티어는 다양하고 복잡한 기업 환경 속에 성공적으로 AI를 이식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대다수 기업이 AI 도입에 실패할 때, 팔란티어 고객들만이 과감하게 지갑을 여는 이유다.

알렉스 카프 팔란티어 CEO가 강조한 "고객의 고통(복잡성)을 삼켜 제품을 만든다"는 철학은 이제 업계 표준이 됐다. 실제로 오픈AI(OpenAI)조차 최근 솔루션 엔지니어 등 현장 지원 조직을 전 세계적으로 확대하며 '현장 구현(Production)' 중심으로 체질을 개선하고 있다. 작년부터 급증하고 있는 실리콘밸리의 현장 엔지니어 채용 공고는 AI의 주 전장이 연구실에서 '현장'으로 이동했음을 시사한다.
아메리칸 다이나미즘: '애국'이 돈이 되는 시대
팔란티어의 성공 이후 방산 스타트업 투자가 실리콘밸리의 주류 트렌드로 부상했다. 이 열기는 미국을 넘어 유럽 등 전 세계로 빠르게 번지며 다수의 '유니콘'(기업가치 $10억 이상의 스타트업)이 탄생하고 있다. /그래픽=강지호 기자
두 번째 조건은 '아메리칸 다이나미즘(American Dynamism)'이다. a16z가 주창한 이 개념은 국방·제조·우주 등 국가 존망이 걸린 문제를 해결하는 기업에 자본과 인재가 몰리는 현상을 뜻한다.
과거 실리콘밸리가 국방부와 거리를 뒀다면 지금은 '국가 안보를 위한 기술'이 가장 혁신적인 트렌드다. S급 창업자는 전장과 산업 현장으로 눈을 돌리고, 투자자들은 이들에게 돈을 대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샴 생커 팔란티어 CTO는 "창업자들이 돌아왔다(The founders are back)"며 지난 3년간 1200억 달러 이상의 민간 자본이 국방 분야로 유입됐다고 밝혔다.


이 흐름을 탄 대표 주자들의 성과는 놀랍다.

◆ 안두릴(Anduril): 창업자 팔머 럭키(Palmer Luckey)는 오큘러스 VR을 메타에 매각해 큰돈을 벌었지만, 안락한 은퇴를 택하는 대신 국방 난제 해결을 위해 재창업에 나섰다. 안두릴은 기존 방산 업계의 '원가 보전(Cost-Plus)' 방식 대신, 자체 자본으로 제품을 선개발하는 방식을 성공시키며 140억 달러(약 19조 원) 이상의 기업가치를 달성했다. 자체 OS '래티스(Lattice)'를 기반으로 보잉 등 방산 공룡들을 제치고 미 공군의 주계약자 지위를 따냈다.

팔머 럭키 안두릴 창업자(왼쪽)가 지난해 한국을 방문했다. 안두릴은 대한항공과 한국 및 아시아·태평양 지역 무인 항공기 분야의 파트너십 을 구축했다. 창업 8년차 스타트업이 차세대 무인기의 '뇌'를 설계한다. /사진=뉴시스
◆ 실드 AI(Shield AI): GPS가 없는 전장에서도 자율 비행이 가능한 AI 파일럿 '하이브마인드(Hivemind)'를 개발했다. 실제 F-16 전투기의 무인 공중전(Dogfight)을 성공시킨 이 기업은 수십억 달러의 가치를 인정받으며 '파일럿 없는 공군' 시대를 앞당기고 있다.
방산 데이터 시장은 개별 솔루션을 넘어 거대한 '플랫폼' 경쟁으로 치닫고 있다. '고비니(Govini)'가 데이터 분석으로 국방부의 의사결정을 지원하고, '디펜스 유니콘스'가 낙후된 국방 SW 인프라를 클라우드 환경으로 탈바꿈시키는 식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스펙터옵스(SpecterOps)는 해커의 침투 경로를 선제적으로 차단하는 기술로 보안 영역의 표준을 만들며, 실리콘밸리 기술이 국방의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 생태계까지 장악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미국을 넘어 전 세계로 확산 중이다. 독일의 헬싱(Helsing)은 '소프트웨어 정의 국방'을 기치로 내걸고 유로파이터 등에 탑재되는 AI를 개발하며 기업가치 50억 유로의 거대 유니콘으로 성장했다. 프랑스 또한 위성 정찰 AI 기업 프렐리전스(Preligens)를 자국 방산 대기업 사프란(Safran)이 인수하도록 이끄는 등, 미국의 기술 패권에 맞서 독자적인 방산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미국을 필두로 세계 각국이 첨단 기술이라는 '솔루션'을 통해 미래 전력 구축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지만, 안보 역시 정쟁의 도구로 전락한 '기술 강국' 한국의 현실은 초라하다. 사진은 대북확성기 철거 모습. / 사진=뉴스1
한국엔 왜 '넥스트 팔란티어'가 없나: '닫힌 문'과 안일한 생태계
반면 한국의 현실은 답답하다. '제2의 팔란티어'를 기대하기엔 토양이 너무나 척박하다. 최근 정부가 'K-방산 스타트업' 육성 등을 외치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혁신 기업이 자라날 수 없는 '구조적 장벽(제도)'과 '안일한 생태계(문화)'의 한계를 호소한다.
일단 국방·공공 시장의 '문턱'이 너무 높다. 미국은 스타트업 기술 도입을 위해 보안 인가 절차를 간소화하고 데이터를 과감히 개방하는 추세다. 반면 한국은 최근의 개방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보안'이라는 절대적 잣대가 스타트업의 진입을 가로막는다.

AI 개발의 핵심인 데이터는 '군사 기밀'로 분류돼 접근조차 어렵고, 사업 획득 구조는 수십 년간 대형 방산 기업(Prime) 위주로 짜여 있어 기술력 있는 스타트업이 독자적으로 비집고 들어갈 틈이 좁다.

국민의힘 유용원 의원이 발의한 '소프트웨어 중심 무기체계 획득절차 특별법안' 주요 내용 캡쳐. 기존의 무기 획득 절차는 하드웨어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어 '한국판 팔란티어'가 나올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부족했다. 지금이라도 국방 소프트웨어 입법 논의가 시작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자료=유용원 의원실 제공, 사진=시대
어렵게 들어가도 '용역 업체' 취급받는다. 이른바 '맨먼스(Man-Month·투입공수)'로 대변되는 전근대적 발주 관행이다. 한국 기업들이 팔란티어의 FDE를 흉내 내 현장 엔지니어를 투입해도, 한국 시장에선 까다로운 요구를 들어주는 '파견 용역'으로 전락한다.
10명이 한 달 걸릴 일을 기술 혁신을 통해 1명이 하루 만에 끝내면, 오히려 매출(인건비 산정액)이 급감하는 기형적인 구조 탓이다. 이 'SI의 늪'에 빠진 기업들은 R&D보다 당장의 매출 유지를 위한 인력 파견에 급급하게 된다.

창업자와 투자자조차 '쉬운 성공'에 안주한다. 앞서 언급한 장벽들 때문에, 애초에 이 어려운 문제를 풀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이 뼈아픈 현실이다. 알렉스 카프 CEO가 저서 '기술 공화국 선언'에서 비판한 "인류의 난제를 외면하고 돈 되는 앱만 만드는 문화"는 한국에서 더 심각하게 나타난다.

국내 유니콘 스타트업은 쿠팡, 우아한형제들(배달의민족), 비바리퍼블리카(토스), 무신사 등 대부분 B2C 플랫폼에 편중돼 있다. 국가 안보나 제조 혁신 같은 '거대 담론'을 다루는 딥테크 기업은 찾아보기 힘들다. 실패 확률이 높고 회수 기간이 긴 국방 기술에 인생을 걸 창업자도, 이를 지원할 모험 자본도 부족한 상태에서 '한국판 팔란티어'의 등장을 기대하는 것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기술이 아닌 '생태계'를 혁신해야
결국 '넥스트 팔란티어'는 단순히 기술력이 뛰어난 회사가 아니다. △'국가의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대담한 비전 △고객의 문제를 끝까지 책임지는 'FDE 문화' △그 가치를 인건비가 아닌 성과로 인정해 주는 '시장(American Dynamism)'이 결합한 결과물이다.

미국이 '팔란티어화'를 통해 국방과 산업 경쟁력을 동시에 끌어올리는 동안, 한국은 낡은 규제로 문을 걸어 잠그고 유망한 AI 기업들을 용역의 늪에 가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뼈아픈 자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전문가들은 이제라도 국방 데이터의 과감한 개방과 '맨먼스' 타파를 통한 성과 기반 계약 도입 등 제도 개선에 나서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돈 되는 앱'을 넘어 국가적 난제에 도전하는 기업가 정신의 회복도 동반돼야 할 것이다.

◆특별취재팀=제도혁신연구소 이상언 소장·이무영 부소장, 정치경제부 김인한·김성아 기자, 산업1부 최유빈 기자, 증권부 이동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