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두릴은 미국의 대표적인 방산 스타트업이다. '연례 행사'처럼 신규 투자를 받았다. 투자가 마무리 될 때마다 매번 기업 가치는 거의 두 배로 올랐다. /데이터=Axios, 로이터, 그래픽=신재민 편집위원
미국 방산 스타트업 안두릴(Anduril)은 창업 2년 만인 2019년 유니콘(기업가치 10억 달러)에 등극했다. 지난해에는 오픈AI를 제치고 CNBC 선정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스타트업' 1위에 올랐다. 현재 진행 중인 신규 투자가 마무리되면 기업가치가 600억 달러(약 90조 원)에 이를 전망이다. 국내 최대 방산기업 한화에어로스페이스(약 70조 원)를 훌쩍 뛰어넘는다.

안두릴은 지난해까지 70억 달러(약 10조원)를 넘는 투자금을 모았다. 페이팔과 팔란티어 창업자 피터 틸이 이끄는 파운더스펀드는 모든 라운드에 참여했다. 민간자본의 적극적인 투자가 빠른 성장을 이끌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방산', 글로벌 벤처투자의 '대세'
글로벌 VC들의 방산 투자는 사상 최대 수준이다. 지정학 리스크가 부각되는 가운데 AI·우주 등 첨단 기술이 최근 전쟁에서 탁월한 성과를 보여준 영향이다. /그래픽=신재민 편집위원
글로벌 방산 테크 전문 뉴스레터 DIIE는 "방산 테크가 벤처캐피탈(VC) 투자의 주류(mainstream)"라며 "2025년은 이에 대한 의구심을 잠재운 한 해"로 평가했다. 글로벌 투자 조사기관 피치북은 2025년 글로벌 방산 분야 VC 투자 규모를 전년 대비 약 2배로 급증한 491억 달러(약 68조원)로 집계했다. 투자 건수도 2020년 414건에서 2024년 629건으로 52% 늘었다(S&P 글로벌).
이 흐름에 뛰어든 자본의 면면도 다양하다. 컨설팅 기업 부즈앨런해밀턴은 3억 달러, 글로벌 헤지펀드 포인트72는 4억 달러 규모의 펀드를 조성했다. 실리콘밸리 대형 VC들도 적극적이다. 앤드리슨 호로위츠(a16z)는 2026년 1월 방산 등 국가 우선 산업을 겨냥한 11억 달러 규모의 신규 펀드를 결성했다. 24개 NATO 동맹국이 공동 출자한 'NATO 혁신 펀드'는 10억 유로를 딥테크 스타트업에 투입하고 있다.

미국 방산 전문 VC '뉴 비스타(New Vista)'의 커스틴 바톡 공동 설립자는 <시대>와의 인터뷰에서 방산 벤처 투자가 급증한 배경으로 각국 정부의 적극적인 '이중 용도(Dual-use, 민군 겸용) 기술' 수용과 생태계의 체질 변화에 주목했다. 그는 "최근 방산 업종을 주도하는 스타트업들은 AI와 우주 등 고성장 첨단 기술 분야에 포진해 있어 VC의 기대 수익률을 충족시킨다"며 "과거 대기업 중심의 '저마진·저속' 구조에서 벗어나면서 매력적인 투자처로 부상하게 됐다"고 분석했다.


방산 VC도, 스타트업도 없는 한국
한국은 이러한 세계적 흐름과 동떨어져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VC들의 방산 투자 비중은 미미한 수준으로, 별도의 통계도 없다. 베인앤드컴퍼니에 따르면 2024년 1000만달러(약 150억원) 이상 투자받은 글로벌 방산 스타트업이 99개 사에 달했다. 하지만 이 리스트에 한국 기업은 없다.

업계 전문가들은 투자의 기본 전제인 '시장'이 없는 것을 이유로 꼽는다. 방위사업청의 '2024년 방산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4년 방위산업에 참여한 전체 529개 업체 중 업력 10년 이내 스타트업은 단 16개, 3%에 불과했다. 한 국내 대형 CVC 임원은 "방산 스타트업 투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혁신이 아니라 정부의 구매 결정"이라며 "수요가 발생할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불확실성을 감내할 민간 자본은 없다"고 말했다.

방산 업계에 뛰어든 스타트업은 '제한된 데이터 접근'과 '기울어진 조달 법제도'라는 두 개의 벽을 동시에 넘어야 한다.


'기술'보다 '가격', '혁신'보다 '납품 실적'
방사청 '물품 적격심사 기준' . 부품·장비·소프트웨어 등 물품 납품 계약은 방위사업청의 '물품 적격심사 기준'을 통과해야 하고, 전투기·함정·드론 등 무기체계는 별도의 전력화 획득 절차를 거쳐야 한다. 두 경로 모두 스타트업에게는 구조적으로 불리하게 설계되어 있다. /사진=국가법령정보센터
군이 부품·장비·소프트웨어 등을 경쟁입찰로 구매할 때는 방사청의 '물품 적격심사 기준'을 적용한다. 문제는 이 제도가 철저히 '기존 기업'을 위해 설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계약 낙찰자로 선정되려면 100점 만점에 95점이 필요하다. 스타트업에게는 불가능한 점수다. 심사 항목 중 '납품 실적'에 10점이 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항목에서 만점을 받아도 총점 90점에 그쳐 탈락하게 된다. 업계에서 "팔란티어나 안두릴 같은 첨단 기업이 한국에서 창업했어도 첫 관문을 넘지 못했을 것"이라는 자조가 나오는 이유다.

다른 항목도 탁월한 기술력을 지닌 신제품을 평가하는 데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심사 배점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입찰 가격(40~60점)'이다. 이는 제도가 기성품을 전제로 단가를 낮추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의미한다. 그다음으로 비중이 높은 항목은 '경영상태'(30~40점) 항목이다. 업체의 신용등급을 본다. 연구·개발 투자로 인해 초기 적자를 감수하며 시작할 수밖에 없는 딥테크 스타트업들은 낙제점을 받기 쉽다.

반면, 스타트업의 유일한 무기인 '기술 능력' 항목은 0~20점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평가 기관의 보고서에 따라 등급제로 분류돼, 파괴적 혁신의 가치를 온전히 점수에 반영하기 어렵다.

정부도 제도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신속시범획득사업이나 우수조달물품 지정 등 우회 트랙을 마련했다. 그러나 업계 관계자들은 이러한 정책들이 실효성 있는 대규모 본사업 조달로 이어지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미국의 '인큐텔' 모델이 성공을 거두면서 글로벌 각국은 '방산 특화 정부 투자기관'을 설립했다. 대부분 일반 VC같은 지분 투자 방식으로 운영된다. 이스라엘이나 일본처럼 지원금을 주는 모델도 있다. 이 기관의 역할이 단순한 '자금 집행'에 그치지 않는다. '국가 안보에 도움되는 기술을 실질적으로 도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중국이 가장 적극적이다. 국유기업과 정부가 펀드 출자 구조를 장악해 민간 기업을 군사 목적에 연계시키는 '군민융합' 전략을 구사한다. /그래픽=신재민 편집위원
'인큐텔 모델', 투자부터 조달까지 리드
전문가들은 대안으로 미국의 '인큐텔(In-Q-Tel, IQT) 모델'을 제시한다. 더브이씨 변재극 대표는 한국벤처창업학회 2025 추계학술대회에서 "수익성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민간 자본은 첨단 산업 투자에 한계가 있다"며 "국방 분야에서 정부가 마중물 역할을 해줄 수 있는 한국형 인큐텔을 고민해볼 시기"라고 말했다.
인큐텔은 '닷컴 열풍'이 한창이던 1999년 CIA 주도로 설립된 실리콘밸리식 VC다. 당시 국장이었던 조지 테넷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IT 산업의 젊은 혁신가들이 가진 뛰어난 재능을 활용하기 위해 독립적인 민간 비영리 VC를 설립했다고 밝혔다.

일반 VC가 수익률을 좇는 것과 달리 인큐텔의 투자 기준은 철저히 '국가 안보 기여도'다. 인큐텔 공동 설립자이자 초대 CEO인 길먼 루이에 따르면 "처음부터 우리의 임무는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실제 작전에 투입될 기술을 찾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인큐텔은 정보기관이 당면한 기밀 '문제 세트'를 실리콘밸리가 이해할 수 있는 '투자 테마'로 번역해 혁신 기술을 발굴한다.
"국가를 수호하기 위해 글로벌 혁신에 투자한다" 인큐텔은 25년간 850개 이상의 첨단 기술 기업에 투자해 50개 넘는 유니콘을 배출했다. 단순히 투자만 하지 않는다. 기술이 정부 조직에서 쓰일 수 있도록 적극적인 중개자 역할을 수행한다. /사진=인큐텔 홈페이지
기술이 확보되면 수요자와 스타트업을 직접 연결해 조달 계약까지 끌어낸다. 루이 전 CEO는 "기관 내부의 관료주의를 뚫고 기술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전도사'가 되는 것"으로 이 과정을 묘사했다. 그는 "기술이 어떻게 생명을 구하고 작전을 성공시키는지에 대한 강력한 스토리를 전파함으로써, 혁신 기술이 내부의 저항을 뚫고 실제 작전에 투입되게 만드는 '인적 패스트트랙 역할'을 수행했다"고 말했다.
'인큐텔 모델'의 실효성이 검증되면서 민간의 벤처 투자 방식을 국방 생태계에 접목하는 것이 이제는 보편적인 안보 전략으로 자리 잡았다. 실제로 세계 각국은 최근 10년 사이 앞다퉈 인큐텔과 유사한 기관을 설립했다.

◆특별취재팀=제도혁신연구소 이상언 소장·이무영 부소장, 정치경제부 김인한·김성아 기자, 산업1부 최유빈 기자, 증권부 이동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