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강지호 기자
부동산 신화에 저당 잡혔던 대한민국 금융의 물줄기가 거대한 전환점을 맞았다. 가계부채를 마중물 삼아 자산 거품을 키우던 시대가 저물고 그 자리에 미래 산업의 숨통을 틔우는 '생산적 금융'이 흐르기 시작했다.
금융 대전환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집값을 떠받치던 가계대출의 수도꼭지는 바짝 죄되 첨단 전략 산업과 혁신 기업에는 자금의 빗장을 과감히 푸는 것이다. 금융이 더 이상 부동산 시장의 조연에 머물지 않고 실물경제의 기초체력을 다지는 본연의 엔진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정책적 결단이 행동으로 옮겨진 결과다.

12일 금융권에 따르면 올해 정부는 가계대출 증가율 목표치를 전년(1.7%)대비 하향 조정(1.5%)하고 주택담보대출을 별도 관리하기로 했다. 동시에 150조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를 통해 첨단산업으로의 자금 유입을 가속화한다.


이번 기조는 이재명 대통령이 부동산 시장 안정을 위한 핵심 기제로 '금융의 역할'을 직접 지목하며 힘이 실리고 있다. 금융 공급의 방향성을 틀어 투기 수요를 차단하고, 산업 현장의 혈맥을 뚫어주겠다는 의지가 분명해진 것이다.

이러한 전환은 단순한 대출 규제를 넘어선 구조적 개편을 의미한다. 그동안 금융권 자금이 담보 위주의 가계대출에만 과도하게 쏠리면서 정작 혁신기업들은 자금난에 시달려왔기 때문이다. 정부는 집값 상승이 부동산 대출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않고서는 국가 경쟁력 확보가 어렵다고 보고 있다.

금융위가 추진하는 국민성장펀드는 향후 5년간 150조원 규모로 조성돼 첨단전략산업의 버팀목이 될 전망이다. 시장의 외면을 받기 쉬운 초기 혁신 분야까지 금융의 낙수효과가 미치도록 하겠다는 구상이다.


지난해 11월 이억원 금융위원장은 '국민성장펀드 사무국 현판식 및 업무협약식'에 참석해 "생산적금융 대전환 제시 후 금융권에서도 정책방향에 화답하고 있으나 시장의 평가는 아직 냉정하다"며 "금융권이 여전히 이자장사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올리고, 산업 이해에 근거한 전략적 재원배분에 충분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평가가 많다"고 지적했다.

이어 "국민성장펀드는 그 규모 뿐만 아니라 지원방식과 협업체계도 그간의 산업금융이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이라며 "기존의 영업관행과 마인드는 획기적으로 뜯어고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회장님이 직접 챙긴다…방향 바꾼 돈의 흐름
임종룡 우리금융 회장./사진=우리금융
정부의 생산적 금융 드라이브는 그동안 가계대출 위주의 안정적인 수익 구조에 안주해 온 금융권에 근본적인 체질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금융권 역시 비판의 대상이었던 '이자 장사'에서 벗어나 혁신 기업과 미래 산업의 혈맥이 되어야 한다는 시대적 소명에 응답하기 시작했다.
특히 주요 금융지주들은 회장 직속 협의체와 전담 조직을 가동해 생산적 금융 전략을 구체화하는 데 속도를 내고 있다. 반도체·AI·에너지 등 전략 산업을 겨냥한 '1호 프로젝트'를 잇달아 내놓으며 자본의 축을 부동산에서 미래 성장 동력으로 옮겨가는 모습이다.

KB금융은 3조3000억원 규모의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발전 사업 등 국가 반도체 경쟁력을 좌우할 핵심 거점에 힘을 보태고 있으며 신한금융은 15대 초혁신경제 분야를 선정해 집중 지원하고 있다. 이를 위해 2030년까지 5년간 총 110조원을 투입하는 '신한 K성장·K금융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하나금융의 1호 프로젝트는 현대중공업과 손잡고 추진한 K-조선 산업 수출 공급망 금융지원이다. 총 4000억원 규모의 유동성을 공급하며 보증료 전액 지원과 금리 우대 등 현장에서 체감할 수 있는 실질적 혜택을 제공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우리금융은 향후 5년간 80조원을 투입할 계획이며 국민성장펀드에 민간 금융사 가운데 가장 먼저 10조원 참여를 선언했다. 임종룡 회장이 의장을 맡은 첨단전략산업금융협의회를 통해 매월 9개 자회사 대표들과 첨단 전략산업 청사진을 그린다.

NH농협금융은 'NH대한민국상생성장펀드'를 총 1조원 규모로 조성한다. 연내 2차례에 걸쳐 조성되며 AI, 디지털, 에너지(신재생에너지 포함) 등 첨단전략산업 대상 인프라 및 전후방 산업에 힘을 보탠다.
과제 안고 첫발 뗀 생산적 금융…과제는

이억원 금융위원장이 지난 2월25일 오전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제4차 생산적금융 대전환 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사진=금융위
주요 금융그룹들이 앞다투어 생산적 금융 확산에 힘을 보태고 있지만 이제 막 첫발을 뗀 단계인 만큼 현장에서는 풀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가장 큰 과제는 생산적 금융의 기준을 보다 촘촘히 다듬는 일이다. 정책 방향에는 공감하지만 실제 집행 단계에서는 대상 산업과 기업을 선별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단순한 물량 공세식 지원을 넘어, 혁신의 적재적소에 자금이 스며드는 질적 금융으로 안착하기 위한 정교한 설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생산적 금융 자체는 분명 가야 할 방향이 맞다"면서도 "다만 막상 현장에서 적용하려고 보면 어떤 산업과 기업을, 또 어디까지 포괄할지 기준이 다소 넓고 추상적인 측면이 있어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정교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생산적 금융이 안착하는 과정에서 성과를 바라보는 방식도 함께 정비돼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금융사마다 역할과 영업 구조가 다른 만큼 외형 중심의 평가가 강조될 경우 산업 발굴과 육성보다는 단기간에 성과가 드러나는 분야로 자금이 쏠릴 수 있다는 우려다.

다른 시중은행 관계자는 "업권별 특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않으면 단순 숫자 경쟁으로 흐를 가능성도 있다"며 "자금 규모뿐 아니라 실제 산업과의 연결성, 파급 효과를 함께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국민성장펀드도 아직은 초기 단계여서 투자처 발굴 과정에서 대형 우량기업 중심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을 수밖에 없다"며 "다만 제도가 안착하고 사례가 쌓이면 중소·중견기업과 전후방 산업으로까지 자금 흐름이 확산될 여지가 충분하다"고 내다봤다.

반도체 등 일부 첨단산업은 특정 기업 중심의 구조로 인해 자금이 투입돼도 산업 전반으로 확산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반도체와 AI 등 첨단산업은 공급망 구조가 복잡하고 투자 단위도 큰 만큼 초기에는 대기업 중심 프로젝트에서 출발하더라도 점차 협력사와 소재·부품·장비 기업까지 연결되는 방향으로 설계가 보완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단기간에 성과를 단정하기보다는 생산적 금융이 산업 생태계 전반으로 퍼져나갈 수 있도록 제도를 다듬어 가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한 금융지주 관계자는 "처음부터 완성형일 수는 없는 만큼 정부와 금융권이 함께 기준을 보완하고 성공 사례를 축적하는 과정이 중요할 것으로 본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