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왼쪽)와 배경훈 부총리 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그래픽=강지호
이재명 정부가 'AI 3대 강국'을 목표로 인공지능(AI) 경쟁력 제고에 나서고 있다.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엔비디아와 공고한 동맹 관계를 구축하고 국내 기업들의 역량을 최대한 끌어내겠다는 구상이다. 일각에선 엔비디아의 과도한 영향력이 국내 AI 산업의 자생력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AI 백년대계를 위해 정부의 컨트롤타워 정비가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배경훈 부총리 겸 과학기술정보통신부(과기정통부) 장관은 지난 8일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와 서울 중구 신라호텔에서 만난 뒤 "베라루빈(엔비디아 차세대 GPU)을 한국에 최우선으로 공급받기로 했다"며 "우리나라가 그래픽처리장치(GPU)를 공급받는 데 차질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과기정통부는 총 2조 850억원 규모의 '정부 GPU 확보·구축·운용지원 사업' 수행 기업으로 네이버클라우드, 삼성SDS, 엘리스그룹을 최종 선정했다. 정부의 'AI 고속도로 구축' 국정과제의 일환으로 추진된 이번 사업은 선정된 기업들과 협력해 총 9704장(차세대 GPU인 베라루빈 2016장과 B300 7688장)의 GPU를 확보·구축하는 것이 골자다. 이를 통해 민간·공공 AI 혁신에 필요한 GPU를 전방위로 지원할 계획이다.


국가 AI컴퓨팅센터 구축도 본격화됐다. 총 사업비 2조 5000억원 규모의 국가 AI컴퓨팅센터는 삼성SDS 컨소시엄이 사업자로 선정됐으며, 2026년 착공해 2028년 개소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정부는 2030년까지 GPU 5만장 확보를 추진 중인데, 국가 차원의 AI 인프라 상당 부분이 엔비디아 GPU를 중심으로 구축되는 셈이다. 이에 AI 업계에서는 "단기 경쟁력 확보와 장기 기술 자립 사이에서 정책 방향이 모호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 AI 개발 환경은 엔비디아의 개발자 소프트웨어 플랫폼인 '쿠다(CUDA)'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일찍부터 엔비디아는 개발자들에게 쿠다를 무료로 개방했다. 연구자와 개발자 상당수가 엔비디아 환경에 익숙해진 탓에 쿠다 생태계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전 세계 표준처럼 자리 잡은 쿠다를 대체하려면 비용과 시간이 만만치 않게 소요된다.
지난 3월17일 오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국민성장펀드 K엔비디아 육성 민관 합동 간담회에 AI 반도체 기업 관계자들이 자리해 있다. 신성규 리벨리온 CFO(왼쪽부터), 김주영 하이퍼엑셀 대표, 백준호 퓨리오사AI 대표, 김녹원 딥엑스 대표, 신동주 모빌린트 대표. /사진=뉴스1
그나마 최근 KT클라우드와 가비아가 리벨리온 기반의 신경망처리장치(NPU) 서비스(NPUaaS)를 출시하고 삼성SDS도 퓨리오사AI 기반 NPU 서비스를 선보이려는 것이 위안이다. 국산 NPU가 기술 실증 단계를 넘어 본격적인 상용화 단계에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 역시 국산 AI 반도체 활용 확대를 독려하고 있지만 국내 NPU 기업들은 정작 시장 진입의 기회조차 잡기 어렵다고 토로한다. NPU는 아직 시장에서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를 충분히 검증받지 못했고, 실제 활용 사례(레퍼런스)도 많지 않기 때문이다. 엔비디아의 파급력이 워낙 막강하다 보니 시장에서는 GPU와 NPU의 사용 격차가 날로 벌어지는 모양새다.

실질적인 수요 창출 정책이 부족하다는 아쉬움의 목소리도 크다. AI 업계 관계자는 "단순한 지원 규모 확대보다는 실제 성공적인 활용 사례를 얼마나 만들어 내느냐가 중요한 과제"라며 "단발성 사업에 그치지 않고 정책의 연속성이 보장될 필요가 있다"고 짚었다. "고성능 컴퓨팅 지원사업의 경우 1년 단위로 진행되다 보니 NPU를 대규모로 도입해 장기 정착시키는 데 한계가 있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AI 업계 관계자는 "정부 지원이 있어 그나마 초기 물량이 소화되고는 있지만, GPU 인프라가 대량으로 배치되면 장기간 교체하기가 힘들다"며 "NPU는 추론 영역에 강점이 있지만 GPU로도 대치 가능한 만큼, 국산 NPU 활용 케이스가 독자적으로 축적되어야만 장기적인 경쟁력이 생길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책 컨트롤타워 부재도 우려를 키우는 대목이다. 최근 하정우 AI미래기획수석과 임문영 국가AI전략위원회 상근 부위원장이 각각 지방선거에 차출되면서, 정부 AI 정책을 이끌어온 대통령실과 국가AI전략위 체제에도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현재 정부는 국가 AI컴퓨팅센터 구축, AI 행동계획 98개 과제 추진, 글로벌 빅테크 협력 확대, 국산 AI 반도체 육성, 전력 인프라 확충 등 대형 과제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AI 전략의 실행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에 정책 조정 기능이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깊어지는 이유다.

전문가들은 엔비디아 GPU를 바탕으로 단기 경쟁력을 확보하고 장기적으로는 국산 NPU가 동반 성장할 수 있는 생태계를 꼼꼼히 조성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김양팽 국제산업통상연구실 연구원은 "엔비디아 GPU를 대량 공급받게 되면 인프라 특성상 상당 기간 이를 유지·사용해야 하므로, 국내 NPU 기업들에게는 결코 유리한 상황이 아니다"라면서도 "그렇다고 정부 입장에서도 당장 엔비디아 GPU 없이 글로벌 AI 경쟁력을 확보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NPU는 특정 특화 용도로 활용되는 만큼 GPU와 완전히 겹치는 경쟁 구도는 아니다"라며 "정부가 장단기 균형을 맞추기 위해 정책적 고민을 깊게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