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희윤 대중문화평론가
미국 그래미 어워즈가 내년부터 5개 시상 부문을 추가한다고 최근 밝혀서 화제다. 그 중 하나가 '최우수 아시아 팝 음악 퍼포먼스' 부문이라서다. 그래미가 아시아 팝 관련 부문을 만든 건 처음이다. 라틴 팝 관련 부문은 많았다. 심지어 '라틴 그래미'라는 별도의 시상식도 따로 있다. 아시아 부문이 생기면 아시아 가수가 그래미를 받을 수 있고, 아시아권에서 글로벌 선두를 달리는 것이 다름 아닌 케이팝이니 나쁠 게 없어 보인다. 월드 투어를 스타디움 규모로 도는 방탄소년단, 블랙핑크도 그래미에서는 상 하나 못 탔는데, 비로소 수상 가능성이 올라갈 것 같다.
그런데 케이팝 팬들 일부는 불안해한다. 첫째, '아시아 팝' 부문 신설이 '올해의 앨범' '올해의 노래' 등 이른바 4대 본상이나 주요 부문 수상을 막는, 아시아 팝의 가두리 양식장이 되는 거 아니냐는 우려 탓이다. 마치 아카데미상이 오랫동안 영미권 외의 영화는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가둬둔 것과 비슷한 차별과 배제의 현상이 일어나리라는 것. 둘째, 무려 4년 만에 컴백한 방탄소년단이 돌아오자마자 빌보드 싱글차트 정상을 탈환한 곡 'Swim'의 수상 가능성이 되레 낮아지는 것 아니냐는 걱정 때문이다.

그래미는 이번에 아시아 팝 부문을 신설하면서, 아시아 국가의 언어를 단편적으로 사용하거나 하나도 안 쓴 노래는 후보 자격에서 제외하겠다고 했다. 방탄소년단의 야심 찬 컴백작이자 빌보드 1위 곡 'Swim'은 100% 영어 노래다. 한국어(아시아 언어) 단어 하나 없다. 컴백 앨범 'ARIRANG' 전체적으로 봐도 영어 가사가 많다. RM을 제외한 6명의 멤버가 유창한 영어 구사자가 아니므로 앨범 녹음 과정에서 애를 먹는 모습은 컴백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 'BTS: 더 리턴'에도 여러 번 나온다. 그런데도 굳이 애써서 영어 노래, 영어 랩을 대거 담은 여러 이유 중 하나는 미답의 목표, 그래미 수상을 위한 것 아니었을까. 그런데 갑자기 이번엔 그래미가 아시아 언어를 요구하는 상황이 된 거다. BTS는 영어로, 그래미는 아시아어로…. 마치 두 대의 큰 차가 동시에 유턴하며 완전히 엇갈리는 듯, '허무 개그' 같은 모양새다.


자연스레 2027년 2월 7일 열릴 제69회 그래미에 대한 최대 관심사는 'Swim'의 수상 여부가 돼버렸다. 타도, 못 타도 논란거리가 될 게 뻔하다. 타면 '아시아 언어를 조건으로 내걸고 왜 영어 노래에 상을 주냐'는 논란이, 못 타면 '미국 시장에서 아시아 출신으로 최대 성과를 거둔 노래에 아시아 팝 부문마저 안 주냐'는 논란이 생길 수밖에 없다. 진퇴양난이다.

벌써부터 그래미를 원망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그깟 그래미 따위 안 받으면 뭐 어떤가. 그래미는 노벨상이 아니고, 빌보드는 월드컵이 아니다. 애당초 그래미는 미국의 음반 업자들이 서로를 칭찬해 주려 만든 상이다. 미국에서 안 파는 물건(음악)은 대상도 아니었다. 브라질, 헝가리, 카메룬, 몽골의 음악 거장 중에 그래미 '받은 사람 찾기'가 더 어려운 이유다.

빌보드는 '미국 내 주간 판매 차트'다. 아시다시피 1년은 52주다. 이론상으론 (복권 당첨 번호처럼) 한 해에도 1등이 52회나 바뀐다. 우리에겐 빌보드 1위가 희귀하고 신기하니 '세계 정복!'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당장 지난주에 누가 빌보드 1위 했는지, 올해 '빌보드 최우수 팝 듀오/퍼포먼스 부문' 트로피는 누가 가져갔는지 대개 알지도 못하고 기억도 안 난다. 몇 년에 한 번씩 나라마다 대표 선수를 뽑아서 겨루는 올림픽, 월드컵과 음악 차트, 음악 시상식은 이렇게 너무 다르다. 게다가 우리 가요는 애초에 미국 시장이 아닌 한국 시장을 겨냥해 만들어지고 발표된 것 아닌가.


한국 노래가 세계에 울려 퍼지고, 한국 가수를 보려고 수만, 수십만 인파가 운집한다는 사실을 요즘 모르는 사람이 어딨나. 미국이 주는 트로피 하나가 뭐 그리 대수인가. 그렇게 치면 우리는 우리 가요가 태국이나 프랑스에서는 상을 받는지 관심 둔 적 있는가. 테일러 스위프트, 레이디 가가가 세계 음악계를 평정하는데 왜 한국 시상식에선 트로피를 안 주나. 이것도 차별인 건가. 봉준호 감독의 말을 빌면, 그래미는 '미국의 로컬 시상식'일 뿐이다.

지금 한국 대중음악의 확장은 파죽지세다. 그래미는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인 액세서리다. 큰 것을 섬기는 걸 우린 사대주의라 부른다. 오랜 사대의 그늘을 벗어날 만큼 우리도 이미 거대해졌다. 지난달 멕시코시티 대통령궁 앞에 5만 아미가 모였다. 월드컵 폐막식 무대에 방탄소년단이 선다. 그래미 안 타도 그 사실을 세상이 다 안다. 역사는 이미 기록되고 있다.

임희윤 대중문화평론가: 전 동아일보, 헤럴드경제 기자. 현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국립국악원 운영자문위원, YTN 시청자위원. 저서 '예술기: 예술과 기술을 이야기하는 8인의 유니버스', '망작들 3: 당신이 음반을 낼 수 없는 이유',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총괄 기획 및 공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