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의 차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4E) 코어 다이 웨이퍼(왼쪽)와 제품.(삼성전자 제공)/뉴스1


반도체 공장 유치에 사활(死活)이 걸렸다. 반도체 초격차 사수와 지역균형발전을 둘러싼 지방자치단체들의 '인재와 영토 전쟁'이 본격화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반도체 신공장의 호남권 유치를 둔 구애가 뜨겁다. 2026년 7월 예정된 광주전남특별시의 탄생이 맞물리며 관련 논의가 속도를 내고 있다.


지자체와 정치권은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하며 해당 기업을 향해 투자를 독려하고 있지만 이 같은 행동을 구애보다 압력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명분과 성과에 쫓겨 억지로 공장만 덩그러니 지어놓는다고 해서 지역 경제가 저절로 살아날 수는 없다. 첨단 산업의 기업 유치란 단순히 건물을 세우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해당 기업의 경영 활동에 불편함이 없어야 하고 그곳에서 땀 흘릴 인재들의 '삶'도 만족스러워야 한다.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논의는 없기에 반도체 업계가 호남행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현실적 우려가 짙게 깔려 있다. 가장 큰 장벽은 공장 가동에 필수적인 '공업용수'와 '전력'이다. 평택 캠퍼스 수준의 공장은 하루 수십만 톤의 초순수가 필요하다. 평택 P3 라인 기준 전력 수요만 약 1GW에 달하는데 광주광역시 전체 가정용 전력 소비량과 맞먹는 규모다.


과거 극심한 가뭄으로 제한 급수 위기까지 몰렸던 호남의 수자원 인프라로는 감당하기 벅찬 규모다. 신재생에너지(RE100) 발전 비율이 높다지만 순간의 정전도 허용되지 않는 반도체 공장 특성상 안정적인 기저발전망 확보는 필수다.

'인재 남방한계선'도 문제다. 수도권을 넘어선 지역으로 우수 연구 인력과 숙련된 엔지니어들은 떠나려 하지 않는다. 반도체 업계에선 대전 이남 발령은 사실상 퇴사 통보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수도권 메가 클러스터와의 물리적 단절도 수백 개의 소재·부품·장비(소부장) 협력사들과의 실시간 대응 능력을 떨어뜨린다. 글로벌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요인이다.


새로 출범하는 광주전남특별시가 전남의 자원과 광주의 인프라를 원스톱으로 제공한다는 것은 매력적이지만 선언만으로는 부족하다.

기업이 입지를 결정할 때 따지는 것은 감성적 구애가 아니라 경영 타당성이다. 용수·전력의 안정적 공급을 국가가 책임지는 특별법적 근거, 소부장 협력사의 동반 입주를 유도하는 클러스터 조성, 인허가 원스톱 처리와 세제 혜택 패키지 등이 먼저 테이블에 올라야 한다.


수도권 메가 클러스터와의 물리적 단절에 따른 조달 리드타임(부품·장비 확보부터 실제 투입까지 걸리는 시간) 증가와 수율 리스크는 기업이 호남행을 주저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다. 협력사 없는 공장은 고립된 섬에 불과하다.

몇 년 전 일본 구마모토현에서 대만 TSMC 공장 유치에 성공해 화제가 됐다. 일본은 막대한 보조금과 규제 철폐는 물론 소니반도체솔루션즈와 덴소 등을 합작 파트너로 끌어들여 안정적인 생태계를 제공했다. 구마모토현은 자부심 강한 대만 엔지니어들이 기꺼이 일본행을 택할 수 있도록 '정주(定住) 인프라'도 이식했다.

TSMC 임직원 자녀를 위한 국제학교를 확충했고 인근 병원에는 전담 통역을 배치해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게 했다. 직원 이직 없이 공장 가동률과 수율이 유지돼야 글로벌 경쟁력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을 압박해 공장을 짓게 한 것이 아니라 기업과 직원이 겪을 애로사항을 선제적으로 해결에 나섰다.

넓은 부지를 줄 테니 공장을 짓고 지역을 살리라는 식의 1차원적 접근으로는 글로벌 첨단 생태계를 품을 수 없다. 정치가 기업의 주소를 바꿔 공장을 세운다고 해서 초격차가 저절로 유지되지는 않는다. 호남을 진정한 반도체 거점으로 만들려면 압력보다 '이유'를 만들어야 한다. 기업이 자발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는 경영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먼저다. 진정한 구애는 그렇게 시작된다.